한국일보

6.25 그 날은…

2019-06-24 (월) 김해종/목사·전 연합감리교회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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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그 날은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되는 날이다. 민족 통일이라는 미명아래 공산주의 북한이 김일성이라는 독재자의 명령으로, 같은 민족인 남한을, 무력 침략하여 3년에 걸처 300 여만 명의 귀중한 인명을 희생 시킨, 피 비린내 나는 민족 상쟁을, 선전포고도 없이 시작한 날이다.

나는 6월 25일 그날, 서울에 있었다. 당시 고등학생으로서 이를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이다. 6.25,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그 당시는 TV도 인터넷도 유튜브도 없던 때, 유일하게 서울 중앙방송 HLKA를 통해서 뉴스를 듣던 때다. 일요일 새벽 북한 공산군이 3.8선 전역에서 일제히 공격을 하여 남한을 침범 하고 있다는 믿기 어려운 소식이었다. 그동안 3.8선에서는 국부적인 도발과 충돌은 자주 있었으나 일제히 모든 포문을 열어 포격하면서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밀고 내려 온 것은 처음이요 천인이 공노할 6.25 전쟁의 시작이었다.

다음날 아침 원효로에서 전차를 타고 효자동에 있는 내가 다니는 K고등학교로 가는 도중 서울역 앞을 지날 때 부상병을 실은 많은 국군 트럭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며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게 되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은 더욱 공포심을 돋궈 주었다. 학교에서는 담임선생이 “오늘 수업은 없고 언제 다시 학교에 오게 될지 모르니 뉴스를 잘 들으라”는 말로 해산 시켰고, 2년 후에야 다시 학교를 열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우리는 다 어떻게 될 것인지, 미래를 알 수 없었다.


집에 와 보니 당시 중앙청에서 정부 고위직을 가지고 계시던 아버님의 말씀은 더욱 심각했다. “우리가 다 피난을 가야 될지 모른다.” 고 하시는 아버님은 몹시 걱정하고 계셨다. 전쟁은 급속도로 진행되어 사흘 만에 서울은 인민군의 손에 들어 갔고 한강 다리가 끊어져, 서울은 인민군의 점령하에 고립 되었다.

아버님은 집을 떠나 친구의 집에 피신해야 했고 여러 차례에 걸친 인민위워회의 가택 수색은 무기를 휘두르며 “늬 애비가 어디 갔는지 대라” 고 위협하며 일본도로 여기저기를 쑤시곤 했다. 수색대가 단념한 듯 발길을 끊자 아버님은 집으로 돌아 오셨으나 이제는 먹고 사는 기본적인 문제가 심각해 졌다. 쌀은 물론 구경 못하고 때로는 먹을 것이 없어 뒷동산의 소나무 껍질이나 솔잎가루로 끼니를 때우는 일도 종종 생겼다.

그들의 뉴스는 계속 낙동강까지 쳐내려가 완전 승리의 날이 멀지 않다는 방송은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갔다. 다만 우리의 희망은 미군 비행기의 공습이 점점 많아졌다는 것이었다.

불행히 아버님은 병환에 걸려 고열로 고생하고 계셨으나 의사도 없고 약도 없고 도움을 얻을 곳도 없었다. 그러나 기적 같은 소식이 들렸다. 맥아더장군의 인천 상륙의 소문이다.

아버님 병환은 더 심해져 코마 상태였으나 미군이 들어 왔다는 소식에 잠시 눈을 뜬 아버지는 “태극기 내다 걸어라” 한마디 남기시고 다시 코마가 되셨다. 그날 밤에 아버님은, 어머니와 우리 사남매를 두고 돌아 가셨다. 오늘은 미국에서 이렇게 목회하고 은퇴하여 이 글을 쓴다는 것을 그 때 아버님이 아셨더라면 안심하고 눈을 감으셨을 터인데…

6.25!, 그날과 그 후 삼년의 전쟁 속에, 나는 살아남았으니 하나의 산 증인이라 하겠다.

<김해종/목사·전 연합감리교회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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