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파타고니아 배낭 여행기 ②바람은 탱크처럼 나를 향해 돌진했다

2019-06-14 (금) 토마스 이 /자유 여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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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 배낭 여행기 ②바람은 탱크처럼 나를 향해 돌진했다

배는 해협 깊은 곳에 정박하고 고무보트로 갈아탄 후 무인도에 상륙해서 트렉킹을 한다.

파타고니아 배낭 여행기 ②바람은 탱크처럼 나를 향해 돌진했다

무인도에 올라 빙하 곁에까지 접근한다. 하지만 빙하 위를 걷는 것은 크레바스 때문에 위험해서 못한다. 산에 오르다 보면 더워서 옷을 벗어야 한다.



바람의 땅, 추위보다 바람이 더 무서워
냉기가 온 몸을 얼음덩어리로 만들어
바람 덩어리가 굴러 온다고 하는 것 정확한 표현
산행 매력은 기막히고 산뜻한 산바람 느낌 아는 경험

바람의 땅, 추위보다 바람이 더 무서웠다. 게릴라 같은 남극의 바람은 숨어 있다가 내가 얼굴을 내밀면 펀치를 가했다. 휘청거렸으나 쓰러지지는 않았다. 태고부터 빙산에서 눈을 먹고 살아온 파타고니아의 바람은 거칠고 폭력적이었다. 그들은 외계인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남극의 순수를 지키는 파수꾼인지도 모른다. 이곳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날씨를 체크한다. 이 황량한 얼음 벌판에는 바람을 막아 줄 벽이 없고, 잠깐 앉아 쉬고 갈 큰 나무가 없고, 하루 밤 묵고 갈 건물이 없다. 남극의 바람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동물이 되어 누구든 나타나면 공격한다. 지구의 북쪽 끝과 남쪽 끄트머리 땅에 사는 바람은 왜 유달리 사나울까. 인간들이 자연의 몸을 뜨겁게 하고, 생태계를 마구 파괴하고 있어 화가 났을까. 바람의 보복은 만만치 않았다.


파타고니아의 바람은 소리가 나는 게 아니고, 오고 있다는 생각은 이곳에서 처음 들었다. 그 바람 소리를 들으면 바람 덩어리가 굴러 온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저 멀리 산꼭대기에서 큰 빙하가 떨어져 나와 캠핑장으로 굴러 내려오듯 나는 소리, 어쩌면 눈사태가 나면 들을 수 있는 소리, 멀리서 바람이 점점 가까이 돌진해 오는듯한 공포. 바람이 부는 게 아니고, 누워있는 텐트를 향해서 돌진하고 있다는 두려움.

밤새도록. 군대에서 듣던 웅~~웅~~~거리며 접근하는 탱크가 내 텐트를 깔아뭉갤 듯이 다가오고 있다는 두려움, 분명 바람인데 소리만 들으면 거대한 암석 덩어리가 캠핑장으로 굴러오고 있는듯한 긴박감. 바람이 이럴 수도 있구나 하고 조마조마 하고 있는데, 거대한 빗자루로 캠핑장을 쓸고 가듯 쏴~~아~~하고 텐트를 쓰다듬고 지나간다. 아, 살았다 하는 안도감. 바람에 텐트가 죽 사발이 안 되었다는 사실. 캠핑장 옆 계곡에서도 빙하가 녹아 폭포처럼 쏟아지는 계곡물 소리도 밤새 탱크 굴러가는 소리를 내며 흐른다.

솔직히 창피한 이야기지만, 모터 사이클을 타고 뉴저지 턴파이크를 달리면서 자는 바람에 크게 다쳐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있었는데, 바람 소리가 너무 무섭고 겁이 나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텐트가 바람에 날라가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났다. 비록 텐트 안에서 벌벌 떨며 있으면서도 과연 바람의 땅이라는 파타고니아의 바람은 사나이다운 멋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의 속도 70마일 이상
바람은 그냥 바람이 아니고, 거대한 바위 덩어리처럼 느껴진다. 텐트를 치기 위해 자리를 찾는데 땅이 좀 평평하다 싶으면 바로 뒤에 큰 나무가 있는데, 이곳의 나무들은 거의 자빠질 듯 대각선으로 기울어져서 자란다. 이곳의 나무들은 생존을 위해서 뿌리가 사방팔방으로 뻗쳐 있어서 편편한 땅이 별로 없다. 하도 바람이 세게 부니 나무들도 안 넘어지려고 뿌리가 다른 지역의 뿌리들 보다 유별나게 많이 뻗어있는 것이다. 나무 옆에 텐트를 쳤다가 바람 덩어리가 굴러 와서 기울어져 있는 나무줄기를 살짝만 밀어도 나는 나무에 깔려 죽을지 모른다.

태평양의 바람을 불어오는 그대로 받는 지형이라 바람의 땅이라고 한다. 걷다가 땀이 나서 셔츠가 젖길래 약간 허리를 숙이고 엎드려서 셔츠를 살짝 들어 올려 불어오는 바람을 등허리로 들어오게 하고 잠깐 있었다. 머리 말리는 헤어 드라이가 무색할 만큼 금방 셔츠가 마르고 땀이 증발해 버린다. 바람이 이렇게 센 줄은 몰랐다. 제트 엔진 뒤에 서 있는 느낌처럼. 트레킹을 걷는데 눈 커플이 흩날리는 정도로 바람이 세다. 탄탄한 내 볼 살도 마구 덜덜 거리며 떨린다. 영화에서 본, 조종실 유리가 깨진 조종사 얼굴이 바람에 뒤틀리고 일그러지는 그런 얼굴처럼 얼굴 살이 요동을 친다. 그동안 산에 다니면서 수많은 바람을 겪어 봤지만, 바람이 무서웠던 건 이번이 처음이다. 과연 파타고니아의 바람이다.

몇 년 전 겨울에, 뉴햄프셔의 영하 20도의 White Mountain을 오를 때 바람이 시속 70마일로 불 때, 몸은 가누기 힘들 정도였지만, 얼굴 살이 이렇게 떨리진 않았는데 이처럼 얼굴 살이 흔들어 댈 정도면 바람의 속도가 70마일은 넘는 것 같다. 내 얼굴이 밀리는 걸로 봐서 바람의 속도를 알 것 같다. ‘바람의 땅’ 이라는 이곳에 매력을 느낀 것은 산행을 하면서 산 위에서 온 몸의 피부로 느끼는 산바람의 기막히고, 산뜻한 느낌을 아는 경험 때문이다. 가파른 산에 오를 때 내 심장은 옛날 증기 기관차가 언덕을 기어오를 때 뿜어내는 수증기처럼 요란하다.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정상에 오른 다음 내 몸을 더듬듯 스치는 바람의 쾌감을 알기에 파타고니아로 온 것도 이 바람 때문 일 것이다,

집들이를 잘하자
재작년에 에베레스트를 9일간 오른 것도, 스페인을 가로 지르는 500마일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던 것도 역시 자연이 만들어 내는 바람의 맛을 알기 때문이다. 맨하탄의 빌딩 숲에서 부는 바람이 어찌 자연에서 불어오는 오염되지 않은 바람과 비교가 될까.


나는 열심인 신앙인은 아니지만, 하느님이 만들어 놓은 아름다운 이 땅에 나를 보낸 것은 이 땅에서 재미있게, 서로 사랑하며 잘 지내다 오라고 보낸 것이라 생각한다. 어찌 보면 하느님이 만든 “지구”라는 집에 집들이를 온 셈이다. 그런데 어차피 다 두고 가야 될 것들을 위해 집 구경도 안 하고, 악착같이 긁어모으는 것은 집 주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매일 아침 그날 할 일을 적어보면 가짓수가 수도 없이 많다.

그런 똑같은 일상들이 모여서 내 ‘일생’이 되어 버린다면 세상을 마감 하는 순간, 후회스럽고, 억울하기까지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후회스런 일들이 하나라도 적으려면 할 수만 있으면 집들이를 잘 하고 가자는 것이 여행의 동기가 되었다. 뉴욕에서 식당 하면서 꽉 막힌 내 가슴을 뻥 뚫게 해주는 비결은 이런 바람 부는 땅을 찾아 다니는 것이다. 자연을 만나 마음의 평온을 느끼고, 바람을 만나서 나를 돌아보는 명상을 하고, 외딴 곳 성당을 찾아 기도 하면서 하느님의 존재를 크게 느끼며 이런 땅에 와서 살다 갈 수 있는 은혜에 감사를 드린다. 하느님은 어디서든지, 어떤 사람이라도 따뜻하게 품어 주시겠지만 바람 부는 광야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을 더욱 불쌍히 여기실 것이다. 나는 바람을 맞으며 신체적으로, 신앙적으로 더욱 강건해지고 있다. 험한 여행을 하면서 자연에게 배운 교훈이다. 내가 굴러오는 탱크 밑에 깔려 본 적은 없지만, 그런 바람 덩어리가 굴러와서 나를 깔아뭉개고 갈 것 같은 그런 바람 소리. 비가 오면 내린다고 하기보다. 비가 때린다고 하는 것이 맞다.

낮에 본 산 밑의 호수에도 바람이 몰아치니 호수 물이 들고 일어나 물보라를 일으키며 안개처럼 산 위로 올라온다. 바람이 호수 물을 들어 올려 물안개처럼 만드는 걸 보니 어릴 때 어머니가 다림질 하면서 입안에 물을 머금고 있다가 확 ~~품어 낼 때처럼 아름다웠다. 자연 속에서 평온을 느낀다.
<계속>

<토마스 이 /자유 여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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