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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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광야의 후예

2019-04-16 (화) 12:00:00 박주리(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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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동네 가게보다 국제 공항에 더 익숙한 아이들, 지하철 타는 것보다 비행기 여행 수속이 더 쉬운 아이들, 주민등록증은 없어도 여권은 있는 아이들, 여러 곳에서 살았지만 고향이 없는 아이들, 인종과 언어가 다른 친구를 둔 아이들…. 선교사 자녀들을 묘사한 표현이다. 끊임없이 나그네처럼 돌아다녀야 하는 그들의 특수한 상황을 묘사한다. 그래서 성향상 안정과 정착이 꼭 필요한 아이는 정서적 불안감이나 외로움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반면 이 과정을 잘 극복하기만 한다면 새로운 환경을 뚫고 나가는 대단한 적응의 근육을 장착하게 된다.

둘째아이가 5학년 때 케냐에서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한 방에 여섯명이 생활하는데 취침시간에 불이 꺼지고 나면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누군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면 다른 아이들도 참고 있던 눈물이 터지며 온 방에 훌쩍 거리는 소리가 퍼진다. 눈물로 베개를 적시며 슬픔의 공감대를 형성한 아이들은 마치 전쟁을 함께한 전우처럼 서로의 삶을 받쳐주는 버팀목이 되어간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될 때쯤이면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스스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우리 아이들이 대학생일 때 방학 기간동안 이스라엘의 키부츠에 보낸 적이 있다. 세계 곳곳에서 모인 젊은이들도 만나고 이스라엘 광야에서 새로운 야생성을 좀 길러 보라는 취지였다. 이스라엘은 아프리카와는 또 다른 긴박성이 있어 키부츠 생활 중 경보 사이렌이 울리면 방공호에 대피해야 한다. 감자밭에서 일하던 큰아이는 방공호가 없어 감자밭에 납작 엎드려 위기를 넘긴 적도 있다. 말로만 듣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을 몸으로 체험한 것이다. 후에 한국 군대생활을 하면서 힘들 때마다 이스라엘에서의 고생을 떠올리며 견딜 수 있었다고 한다.

고생에는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따르는 것 같다. 한국, 미국 할 것 없이 전쟁과 배고픔을 모르는 젊은 세대들의 안일함과 무기력함을 우려하는 소리가 높다. 편안함과 편리함에 길들여져 새롭고 험난한 것을 헤쳐가는 도전정신이 약해서일 것이다. 위기 상황을 대처하며 길러지는 야생성이 약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적도의 태양이 아니어도 좋다. 인생의 광야 훈련을 통해 세상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겨내는 근육을 장착한 그런 다음 세대의 부상을 기대해본다.

<박주리(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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