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부터 딱 20년 전의 일이다. 나는 웬일인지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The Ring of the Nibelung)’를 보겠다고 마음 먹었다. 교양 삼아 보겠다는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좋아서 보고 싶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 작품만큼은 살아서 꼭 한번쯤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난 소감은 시원섭섭 뭐 그런 거였다. 시원했던 것은 꼭 봐야겠다는 작품을 봤기 때문이었고 섭섭했던 것은 이제 다시는 볼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흔히 진리는 평범한 것에 있다고 한다. 좋은 것일수록 쉽고 우리 주위 가까에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바그너의‘니벨룽겐’은 결코 평범한 작품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이 작품을 2주에 걸쳐서 봤는데 일주일에 2번씩 총 20여시간을 할애했다. 지금 생각해도 좀 미친 짓이었다.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해도 다시 볼 자신은 없다. 물론 이 작품이 재미없거나 지루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이 시대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리 어렵지도 또 지루하기는커녕 누구나 한번쯤 보기를 권하고 싶은 작품이기까지 했다. 문제는 긴 시간이었다. 과연 하나의 작품을 공연하는데 4일간, 20시간이라니 해도 좀 너무했다는 생각이다. 사실 이 작품의 초연 당시 상황을 기록한 차이코프스키의 감상문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말인즉슨, 전문가인 자신도 이해하기 힘든 작품을 대중이 이해하길 바라는건 아무리 바그너라해도 좀 너무 했다는 것이었다. 차이코프스키 역시 당시의 공연이 매우 지루했던 모양으로, 혹평이라기 보다는 솔직한 자기 의견을 적었는데 ‘니벨룽겐’은 그러나 세월 속에서 점차 그 내용이 일반에게 인식되면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요즘은 그저 성인 동화 내지 바바리안의 신화 정도로 취급 될 뿐 ‘니벨룽겐’에 대한 어린이 팬들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나는 마치 바그너敎의 신도라도 되는 듯, 경건한 마음으로 ‘니벨룽겐’이 공연되는 첫째날을 맞이했다. 이 작품은 모두 4작품으로 되어있는데 첫 작품이 맨 나중에 쓰여진, 즉 작곡된 순서가 거꾸로 된 작품이었다. 둘째날은 ‘발퀴레(The Valkyrie)’가 공연되었는데 작품 순서는 2번째 작품이었지만 사실 이 작품의 하일라이트가 되는 작품이었다. 바그너는 여성을 숭배했는데 ‘발퀴레’는 그러한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난 작품이었다. 즉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사랑이고 그 모체는 여성이라는 것이다. 바그너는 툭하면 자신이 구원받지 못한 이유를 이 세상에서 진정한 사랑(여성)을 만나지 못한 때문이라고 고백하곤했는데 사실 ‘발퀴레’를 보고 있으면 바그너가 왜 구원을 받지 못했는가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바그너가 추구한 여인은 결코 이 세상에는 없기 때문이었다. 고결한 사랑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여자… 오직 지아비를 위하여 희생할 수 있는 여인… 순결하며 영웅의 배필이 될 수 있는 여인… 그것은 현실 속의 여인과 모성애를 혼동하는 바그너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아무튼 ‘발퀴레’를 보면 바그너의 여성상이 얼마나 이상적이었는가를 절실히 느낄 수 있게 되는데 (차치하고) 바그너가 그처럼 집착하는데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오직 그러한 가운데서만이 이 세상은 진정한 낭만… 구원이 구현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탄호이저’, ‘트리스탄과 이졸데’, ‘방랑하는 화란인’ … 모두 그러한 사랑의 거룩한 죽음, 구원의 문제를 그리고 있다. 주신 보탄은 자신의 딸이자 ‘발퀴레(하늘을 날아다니는 간호의 여신)’이기도 한 브룬힐데를 박제화시키는 비정한 아버지가 되는데 그것은 영원히 타지 않는 불 속에 가두는 의식을 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그것이었다. 오직 영웅이 나타날 때 그녀는 불 속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그녀가 영웅을 위하여 제물로 죽어질, 진정한 사랑의 여신으로 선택됐기 때문이었다.
음악은 잠재의식의 표상이라고한다. 잠재의식은 꿈으로 반영되고, 그 속에 거짓이란 없다. 그러기에 한번 빠지기 시작하면 헤어나기 힘든 마약. 로망롤랑은 음악은 자신의 첫 사랑이라했다. 오직 그렇게밖이 표현될 수 밖에 없는, 음악의 모호함이여. 음악의 사다리, 그 징검다리를 건너다 보면 저 멀리 피안… 구원의 나라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일까? 바그너가 그리고 있는 세계는 꿈이자 피안이었기에 그 꿈은 너무 아프고, 또 현실세계에서 재현되는 음악이기에, 닿을 수 없는 목마름이기도 했다. 이 세상에서 단 한번도 가슴으로 울려오는, 음악을 느껴보지 못한 자들이야말로… 어쩌면 단 한번도 세상을 살아보지 못한, 절규일 뿐이라는 것을 바그너는 20시간이라는 몸부림, 시간의 상대성으로 증명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발퀴레’는 낭만주의 하일라이트로서 (사실 ‘발퀴레’를 모르면 낭만주의를 모른다고 할만큼) 가장 중시 되는 작품이지만 3막 ‘발퀴레의 기행’이 히틀러 등에 의해 남용되면서 요즘은 아쉽게도 그 아름다움보다는 마치 전쟁음악을 대표하는 작품 중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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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