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좋은 사람 되기 위한 연습

2019-03-04 (월) 김성준 콜로라도대 정치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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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 되기 위한 연습

김성준 콜로라도대 정치학 박사과정

대학원 종합시험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몇 년 전의 일이다. 인생의 큰 시험이 또 하나 지나간 기념으로 동기들이랑 학교 안에 있는 볼링장에서 맥주를 마셨다.

사람이 별로 없는 낮 시간이었다. 하필 그때 테이블 이곳저곳을 무작위로 뛰어다니면서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이 있었다. 주변에서 지켜보는 어른들이 있었지만, 강압적으로 아이들을 저지하지는 않으려는 모습이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추측컨대 발달장애아 가정모임에서 단체로 소풍을 나온 것 같았다.

나는 그들에게 아무런 악의나 적의가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 중 누군가가 괴성을 지르면 자동으로 인상이 찌푸려지고, 무심코 그쪽으로 자꾸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마도 아이들과 그들의 가족 중에는 나의 곁눈질을 의식하고 상처를 받을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머리로는 그 가능성을 생각하면서도 그들을 의식하지 않기가 힘들었다.


놀라웠던 것은 함께 맥주를 마시던 나의 대학원 친구들은 아무도 나처럼 인상을 찌푸리거나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두가 태연했다. 미국에서 성장한 그 친구들은 그들과 함께 사는 연습을 나보다 많이 해온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공공장소에서 그들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전에 그들과 공간을 공유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갑자기 내가 문명화가 되지 않은 미개인처럼 느껴졌다.

누군가는 차별 당하고, 누군가는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누군가는 착취당하는 불의한 사회구조 안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하면, 내가 속한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 언젠가 누군가가 경험한 불의와 착취의 경험과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령 내가 그때 볼링장에서 소리를 지르는 아이에게 무심코 던진 시선도 소풍 나온 아이들과 그 가족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차별과 불의의 경험이 되었을지 모른다.

“몰라서 그랬다”, “남들도 다 그런다”는 말로 한 번의 실수는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과거의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은 그런 말을 앞으로 똑같은 일을 반복해도 괜찮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때때로 악의 없이 순진한 사람이 가장 나쁠 수 있다.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리면, 악은 진부하고도 평범한 것이다. 악은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해보지 않는 누구에게나 깃들 수 있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순진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가 속한 이 차별과 불의, 착취의 구조 안에서 내가 하고 있는 말과 행위가 어떤 작용을 하게 될 것인가를 인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예컨대 내가 마시고 있는 싸구려 커피가 저임금으로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남미의 농장을 돕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할인마트에서 구매한 싸구려 옷이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일하는 제3세계 아동들의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좋은 인간이 되고자 한다면, 적어도 내 스스로를 이 거대한 불평등의 구조를 작동시키는 하나의 부품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하는 적은 오랜 기간 내 몸에 축적되어 온 무의식과 상식, 관행이다.

당연히 이들로부터 벗어나려면 순진함이 아니라 부단한 연습이 필요하다. 곁눈질을 하지 않는 연습, 누구도 이유 없이 차별하거나 배제하지 않으며 시공간을 공유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연습 말이다.

<김성준 콜로라도대 정치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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