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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콜클래식-기적

2019-02-22 (금)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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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콜클래식-기적

나는 나이 15세 때 사망선고를 받은 적이 있었다. 사람이 살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아프기도 하고 죽을 고비를 넘길 수도 있지만 그때 나는 너무 어린 나이었다. 다행히 죽음은 면했지만 엉치뼈 부위를 수술하고 온몸을 기브스 한 채 반년 이상을 누워지낸다고 상상해 보시라. 인간이란 싸우고, 저항하고 몸부림치며 실존하는 존재라고요? 그런 것은 오직 책에나 쓰여진 이상일 뿐이다. 극한상황에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투지란 그저 숨만 쉴 수만 있다면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는, 환경의 동물이란 점 뿐이었다. 인간은 몇날 며칠 꼼짝없이 누워서도 밥을 씹어삼킬 수 있는 존재이며 햇볕조차들지 않는 감옥같은 방이라해도 몇달, 아니 몇년의 세월을 박쥐처럼 견딜 수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만약 희망이라는 그런 기대감만 없다면, 아침에 잠깐 깃들다 사라져가는 햇볕, 커튼 뒤에서 방긋히 미소짓는 화단의 채송화, 저 멀리 들려오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음악소리…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는 고구마, 땅콩 몇조각이면 족했다. 그런데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그놈의 생각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이렇게만 누워 있으면 온몸이 굳어질 것이고 그리고 언젠가 기브스를 풀어헤친다고해도 과연 일어설 수 있을지… 앉아있을 수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시기가 얼마나 짧으냐에 달렸지만 고백컨데, 의사라는 존재들은 인간이 제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있다해도 영혼을 동정하는 존재들은 아니었다. 그저 다친 부위나 째고, 썩어가는 곳이나 도려내고 치료하면 그만이었다.

나의 가련한 영혼은 처음 한달 동안은 의사들의 무지막스러움… 인간이 과연 이렇게도 될 수 있는 것인지… 실감하지 못한 채 얼떨떨하게 지나갔다. 문제는 한 달이 지나서 부터였다. 회상컨데, 신은 때때로 인간들에게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케 하는 존재인 것 같다. 가령 극심한 고통 속에 있는 자가 보통의 경우라면 치사량에 가까운 진통제나 마약을 주사놓고도 끄떡없이 버티는 것 처럼 보통의 경우라면 치사량에 가까웠던 그러한 순간들을 과연 광기 없이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을까. 깊은 심연에서, 아니 어쩌면 육신과 정신의 극심한 고통이 내리 눌렀기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정신은 오히려 새털처럼 가볍고 맑아졌다. 삶이란 아무 것도 아니며 그저 손가락 하나, 현재 정맥을 관통하고 있는 주사바늘에 공기 몇방울만 주입해도 즉사할 수 있는 그런 존재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이 순간 절망한다고 해서 또 아등바등 발악한다고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쭉 살아오는 동안에도, 인생이라는 것이 늘 그랬다. 아등바등 발악한다고해서 절망한다고해서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었다. 운명이 인도하는대로, 바람불고 폭풍이 이는대로 그저 바람따라 물결따라 흘러가면 그만인 것이 인생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운명이 나에게 가르쳐준 숙명론자… 패배주의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깊은 심연에서 번개처럼 스쳐가는 영감은, 인생은 고통때문에 절망하는 것도, 실패때문에 절망하는 존재도 아닌 기적이 없기 때문에 절망하는 존재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인간이란 제 아무리 위대하고 선택받은 승리자라해도 기적의 편에 서지 못한다면… 결국 실패한 인생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그것은 존재 자체가 바로 기적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기적이라는 것을 봤다면,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이 세상에는 기적이란 없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였던 것 같다. 기적은 사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존재이며 노력의 땀을 흘려 살아가야 할 존재인 것을 깨닫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한 평생을 살면서 기적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경우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혹시나’하는 기적을 염원해 오면서 살아왔던 것 같다. 병마와 싸울 때, 재능의 한계를 깨달을 때, 절실히 노력해야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싸울 힘을 상실했을 때, 나는 늘 신에게 길을 보여달라고 기도하곤 했다. 그 때 마다 신은 단 한번도 이렇다할 길을 제시해 준 적은 없었다. 그러므로 기적은 사람을 겸손하게 한다. 그것은 기적은 오직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자에게만 나타나는, 신의 특별한 은총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1791년 하이든의 교향곡 96번이 (런던에서)연주될 때 천장의 샹들리에가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때 실내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 하이든의 교향곡을 들으려고 모든 사람들이 앞자리쪽으로 몰려들어 있었다. 뒷쪽 중앙에 떨어진 샹들리에는 아무도 다치게 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교향곡 96번은 ‘기적’이라고 불리게 됐다고 한다. 인생은 아슬아슬한 고비, 석양처럼 저무는 죽음과 그 기적의 창가에 서 본자만이 그 선물의 의미를 알 수 있는 법이다. (하나의 음악으로서,) 마치 당시의 샹들리에가 나의 인생에 떨어진… 지금껏 깨지지않은 아름다운 상처, 기적으로 남아있는 것 처럼.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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