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무슨 빛깔일까? 올 발렌타인날에도 붉디 붉은 장밋빛이 세상을 물들였다. 그러나내 마음엔 하얀 꽃이 핀다. 오래된 세월의 기억은 옛 사진처럼 퇴색했지만 내 사랑의 빛깔은 날이 갈수록 투명해진다.
난생처음 백부님을 뵌것은 대학에 들어간 해 여름이었다. 어머니는 영문을 몰라하는 나를 데리고 큰집이 있는 대구로 내려가셨다. “큰아버님께 인사드려라.”
초로의 백부님은 크신 키에 선비풍의 학(鶴)상이셨다. 뿔테안경 너머로 눈가에 주름을 가득 지으시며 순한 웃음을 웃으셨다. 18년만의 해후로 떠들썩했던 집안분위기가 가라앉은 후에, 백부님은 나를 찬찬히 뜯어보시며 말씀하셨다. “살아있으니 이렇게 만나는구나.”
살아있음... 그러나 정작 내 아버지는 살아계시지 아니하였다. 고법판사로 대학에도 출강하시던 아버님은 6.25동란이 나자 바로 인민군들에게 납북되셨다. 어머니는 나를 밴 만삭의 몸으로 백방을 수소문하며 울며 찾아다녔으나 허사였다. 나중에 서대문형무소에서 북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았노라는 젊은 제자의 전갈만 바람소리처럼 들은 채, 1.4후퇴의 피난민물결에 밀려 부산까지 떠내려오고 말았다.
어머니는 납북된 아버지와 스물두살에 헤어지신 후, 주위와 일체 연락을 끊으셨다. 그리고 짧았던 신혼꿈의 추억만 곱씹으며 나를 키우셨다. 아마도 젊은 어머니의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유복자인 나를 잘 키워,보란듯이 내보이겠다는 당찬의지와 또, 내가 대학갈 만큼 시간이 흐르면 아버지와 재회할 날이 오지 않을까하는 한가닥 희망으로 억척같이 사신 셈이었다.
그러나 정작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어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이산가족 상봉의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져갔다. 우리는 여전히 납북자가족으로 피해를 당할까봐 전전긍긍하며 살아야했다. 그무렵, 내가 대학에 무난히 진학하자, 어머니는“얘야, 이젠 대구로 내려가서 큰아버지께 인사드리자.” 하셨다.
백부님은 내게 아버지의 모습을 하나라도 더 들려주시려고 애쓰셨다. “네 아버지와 함께 우린 동경서 고학을했지. 동대에 다니던 몇 안되는 조선학생으로 포부가 대단했단다. 낭만적인 네 아버진 바이올린도 곧잘켜서 자취방엔 노래가 끊이질 않았고..”
그러나 내겐 아버지의 존재가 먼 이방인처럼 공허했다. 혈육의 정도 살을 부대끼며 살아봐야 정이들게 아닌가. 헤어짐은 결국 관계의 단절일 뿐, 내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백부님 가족과의 해후는 내게 뜻밖의 새 만남을 주었다. 양희누님과의 만남이었다. 백부님의 2남1녀중 막내로, 이름처럼 햇빛같은 미소가 눈부신 미인이셨다. 대학에서 메이퀸으로 월계관을 썼을때나, 화사한 드레스를 입고 조선일보 사신인 음악회 피아노 연주를 할 때, 나는 내 피붙이 중에도 저렇게 아름다운 분이 있을까 하고 신기할 정도였다. 다섯살 위인 누님은 나를 잃었다가 다시 찾은 동생으로 그동안 못 해준 사랑을 한꺼번에 갚아주려는 듯 애쓰셨다.
누님은 내가 건실하고 신앙심있는 청년으로 자라도록 격려해주었다. 틈날때마다 편지로 백부님에게서 들은 내 아버지의 훌륭했던 면모를 적어 보냈고, 내 철없는 고민이나 아픔을 웃는 낯으로 말없이 들어 주었다. 나는 대학생활 내내 누님때문에 세상이 밝고 즐거웠다. 심장을 드려도 부족할 것 같았다.
누님은 미래를 꾸미기에도 열심이었다. 대학원을 마치고 모교에 강사로 나가면서 매형되실 분과 교제를 시작했다. 그는 배우 안성기같이 소탈하면서도 예민한 인상을 풍기던 분이었다. 누님은 곧 새 가정을 꾸미셨다. 예쁜 조카들을 낳으며 스윗홈을 이뤄가셨다.
그즈음, 우리는 또 헤어져야 했다. 이번엔 자의적인 이별이었다. 내가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자 누님은 도약을 위한 발전적 이별이라 이름지었다. 누님은 내 등을 두드리며 타이르듯 말했다. “우리가 살아있으면 꼭 다시 만날 수 있을꺼야.”
살아있으면... 그러나 내가 미국온 지 4년째 되던 초 봄날, 어이없게도 누님이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대구 시댁에서 돌아오던 고속버스가 빗길에 전복되는 바람에, 막내만 남기고 매형 가족이 함께 가셨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미국오고 나서, 누님과 매형께 한번도 속시원히 가슴속 사랑을 전해드리질 못 했던 회한이 밀려왔다. 그리고 나는 왜 사랑하는 아버님도, 누님도 내 의도완 전혀 다르게 이별해야하는가 하는 통한에 오랫동안 아팠다.
삶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다. 그러나 귀한 만남들이 우리의 의도완 전혀 상관없이 헤어질 때가 더 많았다. 그런데도 우린 평생 헤어지지 않을 듯, 소중한 이들에게 소홀하고 예사로 상처주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 나이 먹도록 아직도 만남의 인연을 귀히 다루지 못 하고, 사람 아끼기에 이토록 인색한 아둔함을 언제쯤이나 벗게될까?
매년 발렌타인때가 되면 양희 누님과 가족들에게 하얀 꽃을 올려드린다. 햇빛같이 눈부셨던 누님의 초상 앞에 사랑의 꽃을 바친다. 우리의 헤어짐이 결코 단절이 아니요,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것을 믿는다. 누님과 함께 계실 아버님께도 드릴 기회조차 없었던 사랑을 하늘로 듬뿍 띄워 보낸다. 주위의 소중한 분들께도 한아름 애정을 전한다. 장밋빛 사랑의 속살은 투명한 하늘 빛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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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봉(수필가, Enviro 엔지니어링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