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문의 팝송산책] 세계 문화를 변화 시킨 아티스트 비틀스(9)-링고 스타
2019-02-15 (금)
정태문
그룹의 드럼을 담당하는 링고 스타는 멤버 중 가장 늦게 가입했다. 오리지널 드러머인 ‘피터 베스트’가 팀에서 퇴출된 후 독일에서 연주생활을 하던 그를 ‘팀 리더인 ‘존 레논’의 권유로 1962년 ‘비틀스’에 합류했지만 음악 프로듀서인 ‘조지 마틴’에게 인정을 받지 못해 1963년 첫 레코드 ‘러브 미 두’를 녹음할 당시 드럼 파트에서 제외되고 옆에서 대신 탬버린을 켜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한동안 그는
퇴출된 ‘피터’ 처럼 되자않을까? 하면서 노심초사 했었다. 그럴 때 마다 ‘존 레논’의 강력한 지원으로 계속해서 ‘비틀스’ 멤버로 끝까지 살아남았다. 그의 이름과 존재는 자주 코미디 소재로 사용 되었다.
1971년 팝 음악 시상식인 ‘그래미 시상식’ 에서 어느 연사가 “난 비틀스의 링고 스타 같은 존재 이다” 라고 언급 했었다. 이 말은 ‘난 있으나 마나 하는 신세였다’ 란 뜻. 또한 영화 ‘500일의 여름’에서는 남주인공이 ‘링고 스타’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는 대사가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굳건하게 끝까지 버텨 그나마 ‘비틀스’가 6년간이나 지속한 계기가 되었다. 만약 ‘링고 스타’가 팀에 없었다면 ‘비틀스’는 1 년도 버틸지 못했을 거라고 후에 ‘조지 마틴’이 얘기했었다. 그만큼 그는 항상 상대방의 얘기를 들어주고 팀 멤버들의 융화를 위해 노력했다.
‘링고 스타’ 는 다른 팀 멤버처럼 리버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유년기에 힘든 인생을 걸어왔다. 설상가상으로 4살때 부모가 이혼하여 어머니와 함께 지냈으며 따라서 아버지의 기억이 별로 없었다. 어머니는 청소일과 술집 종업원 일을 하면서 아들을 키웠다. 그는 6살때 복막염으로 혼수상태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겼다.
병원에서 퇴원 후 집에서 이웃집 대리 누나가 개인 학습을 수년간 해주었다. 13살 때 폐결핵에 걸러 요양원에 2년간이나 지냈다. 그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기타나 탬버린 같은 악기에는 관심이 전혀 없고 오직 드럼만 좋아했다. 그해 그의 어머니는 미국 빅밴드 음악을 매우 좋아하는‘해리 그래이브스’ 와 재혼을 했고 그의 양 아버지는 어린 ‘링고’에게 많은 음악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의 나이 17살 때 양아버지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중고 드럼세트를 선물했다. 이것이 그가 후에 드럼머로 활동하게된 계기가 되었다.
그가’비틀스’멤버로 활동할 때는 드럼 연주 실력을 별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것은 인식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재즈 드러머의 현란한 기교와 애드리브 연주에 익숙해져 왔기에 록 드러머의 심플하게 연주하는 스타일에 좋은 평가를 주지 않았다. ‘비틀스’ 해체 후에야 그의 진가가 서서히 인정 받기 시작했다. 많은 음악 전문가들은 ‘링고스타’의 드럼 연주 실력을 재 평가했다. “한 마디로 그는 록
드러머의 기본을 정리한 사람이며 기본 비트에 충실하고 절제되고 흐름을 잘 구사하는 드럼머이었다. 그러면서 평정을 잘 유지하며 본인의 페이스를 지켜가는 훌륭한 연주자 임을 인정해주었고 또한 많은 록 드럼머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오늘날 그의 연주 스타일은 교과서 역할을 하고 있다.
그가 ‘비틀스’에 있을 때 간혹 노래를 불렸다. ‘Yellow Submarine’, ‘With Littel Help From My Firends’, ‘I Wanna Be Your Ma’ 등이다. 결혼 생활은 자신의 팬과 결혼 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이혼하고 007영화 ‘나를 사랑한 스파이’에서 본드 걸로 출연한 여배우 ‘바바라와 바크’와 결혼해서 현재 까지 잘 살고 있다. 그의 현 자산은 약 3 억불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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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