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영어를 배우려면 영어만 써라?

2019-02-11 (월) 김미소 / 펜실베니아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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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28일, 듀크대학교 교수가 중국인 학생들에게 메일을 보냈다. 외국어를 배우는 게 힘든 일인 건 이해하지만, 교내 건물에서 중국어로 대화하면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게 될 수 있으니 유의하고, 교내에서는 영어로만 이야기해줄 것을 당부한다는 메일이었다.

그 후 교수는 거센 비난을 받고, 사과문을 작성하고, 보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듀크대학교 교수의 사례 외에도, 영어를 배울 때는 영어만 사용하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영어만 100% 사용할 수 있는 환경에 가서 모국어는 전혀 사용하지 않고 모국 학생들과 어울려 다니지 않으며 현지인과 영어로만 소통해야 한다는 관념을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영어권으로 어학연수를 떠나는 한국인 학생인들은 영어만 쓰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비행기에 오른다. 한국에 있는 영어 학원 및 유학원은 영어만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고 광고한다.

그런데 이미 모국어가 확립된 성인 학습자가 영어를 배울 때 모국어를 완전히 배제하는 게 과연 유익할까?

최근 연구는 인지적 그리고 사회적 측면에서 모국어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효율적이지는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먼저 인지적 측면에서 모국어는 영어를 배울 때 인지적 가교 역할을 해 준다. 영어를 모국어로 배우는 어린아이들과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성인 학습자는 다르다. 성인 학습자는 모국어를 기반으로 확립된 사고와 발달된 인지체계를 갖고 있다.

성인 학습자는 영어로 사고 및 인지체계를 다시 처음부터 쌓아올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한국어로 잘 발달된 체계를 영어로 표현하는 방법이 필요할 뿐이다.

한국어로 생각한 걸 영어로 써보고 익혀가면서 표현의 레퍼토리를 차근차근 쌓아 가면 된다. 이렇게 한국어는 영어로 된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다리가 되어 준다.

사회적 측면에서 보면, 한국어와 한국인 정체성이 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다. 이를 자원으로 영어를 쓰는 집단에 더 쉽게 사회화되고, 더 많은 의사소통 기회를 얻고, 더 빨리 영어를 익히게 되기도 한다.


아무런 연결고리 없이 현지에 있는 사람들과 만나고 깊은 관계를 만들어가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한국어를 매개로 언어교환 모임에 나가거나, 한국 드라마 및 케이팝 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섞어볼 수 있다. 한인 네트워크를 초반에 활용하여 현지 사람들과 어울리고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한다.

한국어와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모질게 끊어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미국 사회에 그대로 동화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색을 유지하면서 다른 사람과 조화롭게 영어로 소통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익힌다.

외국어를 배울 때 모국어는 걸림돌이나 장벽이 아니다. 모국어를 기반으로 해야 외국어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앞의 듀크대 교수는 이걸 몰랐다. 그 교수는, 외국 유학생들이 대학 캠퍼스에서 영어가 아닌 모국어를 써서 대화하면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했다가 본인이 의도치 않은 결과를 마주하게 되어 버렸다.

<김미소 / 펜실베니아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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