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비혼을 선택했는지 먼저 자기 자신을 아는게중요
▶ 비혼의 가장큰적은 ‘고립’ 적극적으로 공동체 찾고 성공한 비혼자의 조언 들어야
비혼여성 모임‘보스턴 피플’이 비혼과 생활동반자법에 대해 얘기 나누는 팟캐스트‘우리에게 조금 먼 가족이 필요해’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보스턴 피플 제공>
2018년 통계청이 발표한 사회 조사에서‘결혼이 의무가 아니다’고 답한 사람은 56.4%. 통계청이 같은 조사를 실시한 이래 처음으로 과반을 넘어선 수치다. 남성의 36.3%, 여성의 22.4%만이 결혼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는 결혼하지 않은 이들에게‘왜’라는 질문과‘어쩌려고’라는 걱정,‘비겁하다’는 지탄을 여전히 보낸다. 결혼을 선택하지 않음, 즉 ‘비혼’을 설득하고 관철시키는 일은 난감하기만 하다.
비혼을 택한 이들은 결혼의 책임과 의무를 지지 않으므로 그저 가뿐할까. 그렇지 않다. 주거, 의료, 재정 문제, 사회적 편견 등 고난과 역경이 지뢰처럼 숨어 그들을 기다린다. 비혼을‘화제’혹은‘문제’로만 접근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왜 비혼이냐’는 물음은 촌스럽다.‘비혼, 그래서 어떻게’가 온당한 질문이다. 비혼 이후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들에게 물었다. 무엇을 준비하면 될까. 그리고, 누구나 비혼을‘감당’할 수 있을까.
먼저 ‘내가 누구인지’ 물어라
‘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태’를 뜻하는 미(未)혼과 달리, 비(非)혼은 적극적 의지로 결혼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1인 가구부터 동거 관계까지, ‘남성 1인과 여성 1인의 합법적 결혼 상태’와 다른 모든 관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비혼의 형태도, 이유도 저마다 다르다. 가부장적 문화에 편입되고 싶지 않아서, 결혼 비용이 부담돼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비혼인’이 되려면, 먼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게 중요하다. 비혼주의자 백희원(33)씨는 비성애적 관계인 동성 친구와 6년째 동거 중이다. 동거로 누리는 정서적, 경제적 안정감에 만족한 그는 비혼 결심을 굳혔다. 그는 “본인이 혼자 사는 게 나은 사람인지, 누군가와 함께 할 때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인지 같은 걸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며 “어떤 형태의 비혼을 지향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어야, 그래서 자기 자신을 설득할 수 있어야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결혼반지의 자리, 약지를 비운다 한들 그게 어때서. 이렇게 한 손 가득 빛이 나는데. <왕태석 기자>
무작정 혼자보다 ‘함께 하는 비혼’을
지난 12일 저녁 서울 은평구 ‘민중의 집 랄랄라’가 비혼 여성 20명으로 꽉 찼다. 비혼여성 함께 살기 모임인 ‘반달’이 주최한 ‘비혼여성의 주거, 사회적 관계 문제와 대안 강연회’를 들으려고 모인 이들이었다. 강연이 2시간 넘게 이어지는 내내 참석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현장에서 만난 20대 비혼 여성 이모씨는 “혼자서 비혼을 고민할 때는 막연하기만 했었는데, 고민을 나누니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비혼인의 가장 큰 적은 ‘고립’이다. 적극적으로 공동체를 찾아야 한다. ‘반달’ 운영하는 김초롱(28)씨는 “비혼인의 삶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해 기혼자보다 팍팍하다”며 “비혼자들끼리 정기적으로 만나 삶의 지향을 고민하고 소소한 팁도 나누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1990년 국내 첫 독신여성 모임 한국여성한마음회를 만든 김애순(78)씨는 최근 펴낸 책 ‘하고 싶으면 하는거지 비혼’에서 “결혼을 안 했다 뿐 다른 관계가 다 끊어지는 것은 아니다”며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제대로 된 집’, 포기하지 말라
비혼인의 ‘대선배’인 버지니아 울프가 1929년에 낸 산문집 ‘자기만의 방’에서 비혼의 성공 조건으로 ‘자기만의 방’과 ‘돈’을 꼽았다. 그러나 현실은 비혼인에게 ‘자기만의 방’을 허락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가장 보편적인 가구 형태는 1인 가구(28.6%)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위한 주거공간은 턱없이 부족하거나 지나치게 비싸다. 한국의 집이 ‘정상 가족’을 위해 설계돼 있는 탓이다. 내집 마련을 위해 주택청약을 든다 해도 1순위는 ‘신혼부부’ 몫이다. 청년 주거 지원 혜택을 보는 건 하늘의 별따기다.
시원한 해법은 아직 없다. 다양한 주거 실험 사례를 참고해 보자. 비혼지향생활공동체 ‘공덕동하우스’의 홍혜은(31)씨는 2016년부터 비혼지향자 3명과 방 두 개, 거실 하나짜리 공덕동 다세대 주택에서 공동체 생활을 한다. 거주자는 현재 남자 2명, 여자 2명으로, ‘가족 회의’를 통해 각자 사정에 따라 월세와 생활비를 낸다. 비혼 여성 공동체 ‘비혼들의 비행’은 전북 전주 완산구 삼청동에 회원들이 함께 사는 타운을 만들었다.
우에노 지즈코ㆍ미나시타 기류‘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 송제숙‘혼자 살아가기’ <동녘 제공>
‘가족’의 개념을 확장하는 사회
이 모든 분투에도 불구하고, 비혼인들에게 사회는 장벽의 연속이다. 지난 12일 ‘민중의 집 랄랄라’의 모임에 참석한 한 여성의 말. “전신 마취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수술 동의서에 사인해 줄 직계ㆍ혈연 가족이 없다는 이유로 당장 수술을 받지 못한 적이 있다. 흔히 말하는 ‘가족’을 꾸리지 않는 이상 이런 불이익을 계속 당할 수밖에 없는 건가.” ‘개인’이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한다 한들, 법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한계가 분명하다.
인권단체들이 결성한 ‘가족 구성권 연구소’(연구소)는 ‘이성애 부부와 그들의 자녀’로 구성된 가족 패러다임에 문제를 제기하고, 1인 가구부터 동거 가족까지, 다양한 가족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난 24일 서울 동작구 여성플라자에서 열린 연구소 창립 심포지움에서 성공회대 실천여성학 외래교수인 김순남 대표는 “한국 사회는 이성애 가부장적 가족제도 바깥의 삶은 임시적인 관계로 구분하고, 이성애 결혼을 통한 생애 모델만을 공고히 하고 있다”며 “혈연 중심의 가족관계뿐만 아닌 다양한 보호자에 대한 상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혈연이 아닌 관계도 가족으로 인정하고, 비혼자도 상속, 의료, 보험 등 여러 권리에서 소외되지 않게 하는 유럽식 ‘생활동반자법’(가칭)이 현실적 대안으로 거론된다.
비혼 고민자에게 추천하는 콘텐츠
비혼 비혼…이곳저곳에서 외치기는 하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얼 준비해야 하는지 이렇다 할 답을 주지는 않는 것 같다. 비혼을 고민하는 당신, 혹은 비혼을 결심한 당신이 참조하면 좋을 콘텐츠.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는 일본의 두 페미니스트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와 미나시타 기류의 대담을 엮은 책이다. 결혼을 하고 안 하고는 전적으로 개인이 선택할 문제라는 생각 아래 비혼을 둘러싼 사회 변화, 가족관계의 변모, 저출산 문제를 넘나들며 풍부한 논의를 펼친다. 우리나라보다 앞서 비혼 이슈가 도착한 일본을 통해 한국의 미래를 점쳐볼 수 있다.
‘혼자 살아가기’는 캐나다 토론토대 인류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저자가 한국에서 비혼의 삶을 택한 20대 후반~30대 후반 여성 서른 다섯 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것을 통해 비혼여성들의 주거와 독립, 좌절과 투쟁을 분석한 기록이다. 특히 불안한 주거와 재정이 비혼 여성들의 삶을 어떤 식으로 위협해오는지를 현실적으로 담아냈다.
‘하고 싶으면 하는거지…비혼’은 30대의 비혼여성이자 비연애칼럼니스트로 잡지 ‘계간홀로’를 발행중인 작가 이진송이 78년간 비혼으로 살아온 김애순을 인터뷰한 대담과 산문을 엮은 것이다. 두 저자는 비혼으로 살며 겪은 경험과 팁을 나누면서도 비혼을 차별적으로 대하는 사회제도를 꼬집는다. 특히 비혼의 ‘대선배’ 김애순의 경험담을 통해 청년과 중년, 나아가 노년까지 경험한 비혼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마흔 이후 누구와 살 것인가’는 각각 교사, 임상심리학자, 전문간호사인 세 명의 저자가 10년을 함께 보낸 공동주거 체험담이다. 공동협약서 작성, 재산 분배, 노동력 분배, 사생활의 경계부터 정서적ㆍ심리적 측면까지, 결혼하지 않고서 타인과 함께 삶을 꾸릴 때 참고할 자세한 사항이 정교하게 기록돼 있다.
팟캐스트 ‘우리에게 조금 먼 가족이 필요해’는 비혼여성 모임 ‘보스턴 피플’이 비혼과 생활동반자법에 대해 공부하던 중 이를 다른 사람들과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에 시작한 방송이다. 기혼 여성과 성소수자 등 다양한 당사자들을 초대해 혈연과 결혼 외의 방식으로 가족을 꾸리는 것에 대해 얘기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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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소범 기자, 김가현·전근휘 인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