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월 2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아산 정주영 서거 25주기 추모 음악회’에서 김선욱(왼쪽부터), 선우예권, 조성진, 임윤찬 피아니스트가 인사하고 있다. [현대차그룹 제공]
무대에 오르기 전, 대본을 한 번 더 들여다봤다. “100년 후 한국 음악사를 회고할 때 특별히 기록될 장면이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해설자로서 쓴 문장이었지만 입 밖에 내는 순간, 수사가 아니라 선언임을 모르지 않았다.
얼마 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정주영 현대차그룹 창업회장의 서거 25주기 추모 음악회에서 한국 클래식을 대표하는 네 명의 피아니스트가 한 무대에 올랐다. 김선욱, 선우예권, 조성진, 임윤찬. 라인업이 공개되자 온 음악계가 술렁였다. “어떻게 이들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지?"
하지만 공연의 의미는 화려한 이름의 집합에만 있지 않았다. 이들은 독주자가 아니라 앙상블의 구성원으로 서로에게 스며들었다. 각자의 명성을 드러내기보다 서로를 듣고 조응하며 하나의 소리를 만드는 데 헌신했다. 리허설 현장 역시 밀도 높았다.
“내 피아노는 이런 소리인데, 형 피아노는 어때?" 네 명은 각기 다른 악기의 특성에 대해 토론하며 악상을 가다듬었다. 피아노의 위치도 이리저리 옮기며 최적의 공명을 탐색했다. 그렇게 공통의 악상을 조율해 가는 동안, 나는 이 무대의 본질을 보았다. 이들은 경쟁자가 아니었다. 서로를 존중하며 귀 기울여 경청하는 음악적 동료였다.
해설자로서 나는 각 곡의 음악적 맥락을 짚는 동시에 하나의 질문과 씨름했다. 이 곡들은 왜 이 자리에서 울려야 하는가. 곡마다 키워드를 결속시켰다. 죽음을 앞두고 나란히 앉는 네 손 연탄을 택한 슈베르트의 ‘동행', 3년의 절필 끝에 다시 일어선 라흐마니노프의 ‘회복', 오케스트라의 거대한 음향을 마흔 개의 손가락으로 재현한 바그너의 ‘개척', 여섯 거장의 변주를 하나로 엮어낸 리스트의 ‘통합'.
추모 공연인 만큼 음악과 삶의 서사를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음악이 바깥 의미를 설명하는 도구에 머물러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추모는 때로 언어보다 음악이 더 깊이 수행한다. 피아노 한 대에서 두 대로, 두 대에서 네 대로 확장된 울림은 어떤 헌사보다 뜻깊은 방식으로 그날의 의미를 드러냈다.
한국 클래식은 오랫동안 국제 콩쿠르의 성취를 통해 성장해왔다. 그러나 이 무대는 그 다음 장면을 보여주었다. 뛰어난 연주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넘어, 한국 연주자들이 협업을 통해 새로운 형식과 울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 말이다.
나는 해설자로서 그 무대의 안과 밖을 목격했다. 리허설의 치열한 밀도, 무대 뒤의 숨막히는 긴장, 서로를 듣는 힘이 만드는 거대한 파동, 네 명이 번갈아 포옹하던 마지막 커튼콜까지. 결국 100년 후에도 회자될 것은 개별 연주자의 찬란한 기량이 아니라, 서로를 듣고 응답하며 함께 만들어낸 ‘이어지는 울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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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아 피아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