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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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사랑에서 역사의 흔적 찾기로’

2019-01-21 (월) 글 장소현 /극작가·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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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시 리뷰, 김휘부 개인전 ‘점진적 변화’

화가 김휘부가 새 작품들을 소개하며,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였다. 30여 년에 걸친 긴 세월 동안 집중적으로 몰두하며 이룩한 탄탄한 조형세계로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지구 표면’(Geo) 시리즈와는 다른 성격의 작품세계다. 달라졌다기보다 한결 구체적이고 깊어졌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Geo 시리즈에 이어 새로 선보인 작품은 ‘미국의 역사’(USA History) 시리즈다.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구체적이고 상징적인 오브제를 화면 중심에 배치하여, 미국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이번 전시회에는 트랙터의 의자, 오토바이 부속품, 주방용품, 말보로 담배 광고 이미지, 상업 간판, 도로표지판 등등 다양한 오브제가 등장한다. 버려진 것을 주워오거나 고물상에서 구입한 물건들이다.


김휘부 작가의 작업은 오브제를 선택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역사’라고 하지만, 미국처럼 짧은 역사밖에 없는 나라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역사나 지금의 생활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물건들도 마찬가지다. 골동품이 아니라, 그저 조금 오래되어 버려진 물건들이다.

작가가 거기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어 역사를 이야기하게 재창조하는 것이다. 그동안 작업해온 Geo 시리즈가 지구 환경과 대자연의 섬세하고 신비스러움을 추상적이고 관조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인데 비해, 새 작품들은 한결 구체적인 오브제를 통해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숨결과 냄새를 담고 있다. 그것은 작가 자신이 겪어온 삶의 흔적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도 이 땅의 당당한 주인이다”라는 이민자의 선언이기도 하다. 작품의 제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작품은 제목이 USA History, 즉 다양한 인종과 문화로 이루어진 ‘미합중국의 역사’라는 뜻이고, 또 어떤 작품들은 American History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둘 다 ‘미국’이 되지만, 영어에서는 두 단어 사이에 정치적, 사회적으로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김휘부가 작품에서 두 가지 제목을 다르게 사용하는 것은 그런 차이를 반영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앞으로 시리즈가 전개되면서, 두 관점의 차이도 명확해질 것으로 보인다.

화가 김휘부가 역사의식에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중요한 변화다. 역사의식이란 어제, 오늘, 내일로 이어지는 세월, 즉 통시대적 삶의 축적을 의미한다. 그 시간의 축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삶의 흔적이 담겨 있는 구체적 오브제를 도입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 해온 추상화에서 구상미술로 변화한 필연적 이유다. US History 시리즈는 세월과 삶의 역사를 조형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역사(History)는 스토리(story)다. 의미를 갖는 서사구조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김휘부의 ‘USA History’ 시리즈에 있어서도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오브제의 상징성이나 이야기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김휘부는 서사구조에 얽매이지 않고, 철저한 조형성으로 화면을 장악한다. 그림에서 이야기를 읽는 것은 관객의 몫이고, 그림은 그림으로서 완벽해야 한다는 것이다.

‘점진적 변화’라는 전시회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작가의 고집스러운 작업 태도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칠하고 벗기고 붙이고 갈고 흘리고. 그리고 또 칠하고 벗겨내고 하면서 마치 목수가 집을 짓듯 화폭에 작품을 완성해 나가는 그의 작업 과정은 변함이 없다. 거기에 구체적인 오브제가 더해져, 한결 구체적이고 깊어진 것이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추상적 이미지에서 구체적 오브제로, 평면성에서 입체적(부조) 이미지로 변화한 것이다. 구상적 이미지는 병(bottle) 시리즈나 자화상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글자 그대로 ‘점진적 변화’다. 그러나 핵심적이고 중요한 변화다.

캔버스가 아닌 두터운 목판에 마치 건축하듯 칠하고 파내며 다듬은 작품이 주를 이루는 그의 화면은 하나같이 정교한 짜 맞춤, 섬세한 디테일 묘사, 완벽한 마무리로 충만하다.

그리고 그런 철저한 장인정신은 곧 작품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오랜 역사의 동양정신을 가지고 미국에서 ‘유목민의 방황’을 경험해온 이민자 작가의 존재는 귀중하다.

<글 장소현 /극작가·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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