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북쪽의 로마… 탑이 많아 백탑의 도시”

2019-01-1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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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가 방인숙의 동유럽 여행기 ⑧ 프라하 (Prague) 1부

“북쪽의 로마… 탑이 많아 백탑의 도시”

프리하성의 측면.

“북쪽의 로마… 탑이 많아 백탑의 도시”

카를교



체코는 국토 면적·사계절·약소국으로 치러야했던 수난과 비애도 우리나라 닮은꼴
1989년 도시전체 세계문화유산 등재…중세 신성로마제국 모습 그대로 간직
2차 대전 발발 1시간 만에 무조건 백기 도시의 폭격 저지
언덕 위 존재감 뽐내는 ‘프라하 성' 세계서 가장 큰 성으로 기네스북 올라
얀 네포무쿠 성인이 순교했던 ‘카를교' 양편에 300년 걸쳐 세워진 조각상 15개씩

학창시절, 지리시간에 세계의 국명과 수도이름을 암기했었다. 그때 체코슬로바키아도 입력됐는데, 더 이상은 그런 나라가 존재치 않는다. 1992년 주민투표로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돼, 1993년 1월1일을 기점, 국제법상 완전 두 나라로 갈라섰던 것. 평화적인 시민봉기로 공산당붕괴를 이룬 걸 벨벳혁명이라 칭하는 것에 빗대, 벨벳이혼을 했다고 한다.


버스는 슬로바키아를 패스하며 체코로 향한다. 한국차가 맥 못 추던 독일과 달리 현대와 기아차가 확연히 눈에 뜨인다. 가이드 말이 슬로바키아에 기아공장이 있고, 나라이름의 끝 발음이 같은 ‘키아’라고 시민들이 기아차를 무지 좋아한다나. 말이 된다싶어 미소가 인다.

체코는 여러모로 우리나라랑 공통점이 많다. 국토의 면적과 사계절이 비슷하고, 공업이 주산업인 점도 같다. 약소국으로 치러야했던 수난과 비애도 닮은꼴이다.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의 영토였다가 7년간 나치에 지배당했고, 40년간이나 소련의 위성국으로 편입됐다가, 종래는 두 나라로 분리됐으니까. 그럼에도 체코어를 잘 지켰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집요하게 한글과 한국어말살정책을 강제시행 했어도, 꿋꿋이 모국어를 지키고 품은 우리랑 같다.

1989년 도시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이 된 체코의 수도 프라하! 프라하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였기에 중세의 모습이 아름답게 잘 간직됐다. 중세엔 세 가지 권력의 상징으로, 종교권력인 교회 탑, 귀족의 권력인 성탑, 시민의 권력으로 시청 탑이 기본이었다. 괴테가 프라하를 일컬어 “북쪽의 로마고 탑이 많아 백탑의 도시”라 했다. 그런 아름다운 도시가 잘 보존된 이유는, 2차 대전 발발 1시간 만에 무조건 백기를 들어, 도시의 폭격을 저지시켜서다. 일설엔 도시가 너무 아름다워 히틀러가 말년에 거처할 심사로 폭격을 중지시켰다고도 한다. 허나 빨리 항복해서라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언덕위에서 존재감을 뽐내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성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프라하 성으로 갔다. 완성까지 무려 900년이 걸렸다는 성안엔, 성 비투스 대성당, 성 죠지 교회, 로보크위츠 궁전, 카프카박물관, 수도원, 황금소로의 부속건물들이 있다. 나는 비원이나 경복궁이 더 크고 고적하고 정취 있는데, 왜 관광객들을 못 끌지? 분석하고 고민해볼 문제다. 성안에 대통령궁이 있어 소지품검사가 필수다. 건물 중간의 터널통로에서 가방 안을 슬쩍 살피는 식이지만. 통로에서 곧장 연결된 광장에 들어서자, 성큼 나타난 우람하고 거대한 성당의 위용! 압도당해 멈칫하게 된다.

수백 년에 걸쳐 축조된 거대한 성채, 첨탑, 조각품들이 너무 예술적인 성 비투스(Vitus)대성당이다. 33m의 쌍둥이첨탑과 중앙에 우뚝 솟은 종탑이 시선을 앗는다. 종탑아래 지름이 10,5m나 되는 동그란 창은 천지창조의 모티브라나. 안으로 들어가니 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로 요지경세상을 연출중이다. 보통 봐오던 스테인드글라스는 성화(聖畵)나 옛날 천장도배지의 사방무늬식인데 여긴 색다르다. 밖에선 동그란 창으로만 봤는데, 창연한 빗살의 매직으로 활짝 핀 배꽃인지 장미꽃으로 변한 스테인드글라스가 너무 예쁘다. 색유리를 조각조각 이어붙이는 기존방법대신, 유리위에 그림을 그린 후 가마에 여러 번 굽는 방식으로 한 거란다. 그래선지 더 정교하고 화사하게 빛의 예술을 보여준다.

벽에 걸린 얀 네포무쿠(Jan Nepomucky)신부의 수난사그림이 인기다. 일설에 따르면 수난의 발단은 왕비가 외도사실을 신부님께 했던 고해성사다. 신하가 그 사실을 왕께 고자질했고 왕은 신부에게 고해성사내용발설을 요구했다. 신부가 “다만 신에게 전달할 뿐”이라며 끝내 함구하자, 왕은 신부의 혀를 자른 다음 카를교 아래로 수장시켰다. 신부의 유언이 “내 마지막 소원은 이 다리에 선 모든 사람들이 소원을 이루는 것”이었단다. 그 후 이상하게도 나라에 악재가 끊임없던 어느 날, 강물에 5개의 별이 나타나고 신부의시신이 떠올랐단다. 그제야 신부님을 성인으로 추대, 2톤의 은으로 만들어진 묘를 성당에 안치하자 나쁜 일이 멈췄단다. 카를교에서 신부님의 동상을 만지면 소원을 이루게 된다는 속설의 배경이다. 숭고하고 범상치 않은 비극이기에 마음이 묵직하다.

광장에 바로크샘이란 분수도 작품이다. 동그란 기단마다 중세식의 조각상에서 물줄기가 나오니 더 볼만하다. 광장을 둘러싼 교회, 박물관과는 겉모습만 상견례하고 광장 밖으로 나갔다. 철문양쪽기단위에 험악한 거인조각상들이 아래에 깔린 사람을 향해 칼이나 몽둥이를 휘두르는 형상이다. 이른바 300년간이나 체코를 통치했던 합스부르크왕가를 뜻하는 거인들이, 슬라브 민족인 체코인들을 위협하는 동상으로 표정들이 아주 리얼하다. 그들을 겁박하느라 설치한 조각상들이기에 왕가멸망 후엔 철거했을 것 같은데 좀 의외다. 세상이 바뀌었어도,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린 일체유심(一體唯心)이다. 고로 거인들의 눈동자를 제거하는 선에서 범국민적 합의를 본 다음 그대로 둔 거란다. 결국엔 예술품도 수명을 연장하고, 그늘진 역사도 상기각성하고, 관광객들을 불러들이는 문화유산까지 됐으니 일거삼득이다. 잊자고 무조건 다 때려 부수고 말살시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 것이다.


작은 돌들을 촘촘히 박은 길을 내려가니 황금소로란다. 좁다란 골목에 알록달록한 키 낮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달동네치곤 예쁘고 이름 한 번 거창하네 했다. 성에서 일하던 집사나 경비병들의 숙소였다가, 연금술사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황금소로로 불리게 됐단다. 무엇보다 카프카가 1년 정도 머무르면서 성(城)을 썼다니, 이름값이 타당해졌다. 단편 ‘카프카, 황금소로를 따라서’에선 작가가 ‘카프카라는 이름과 황금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는 이상하게도 여전히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고 썼다. 나 역시 그런 묘한 점을 느꼈다.

리틀 베니스라 칭하는 강마을 캄파섬이다. 캄파섬과 말라스트리나 지역 사이에 ‘악마의 수로’라는 좁은 수로다. 양옆으로 예쁜 집들과 다리 옆에 물레방아도 있다. 느닷없는 한국형 시골스러움에 와락 반가움이 엄습한다. 물레방아 옆 앙증맞은 동상은 액을 막아준다는 ‘악마의 동상’이다. 보기엔 백설 공주의 난쟁이동상 비슷한데, 이 수로의 주인공 악마라니... 재밌다. 마침 작은 유람선까지 지나가니 갈리버의 어느 소국에 온 시각적 착각에 빠진다.

조금 가니 장터마냥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있다. 한쪽 건물 담엔 온갖 색깔의 낙서와 그래피티 잔뜩 그려졌다. 헌데도 사람들은 그 위에다 또 칠하고, 그리고, 난리도 아니다. 군데군데 존 레논 얼굴이 있는 존 레논 월(Lennon Wall)이다. 이런 벽화에 하필 존 레논? 답은 세계평화를 염원한 그의 노래 이메진(Imagine)이다. “모든 인간이 평화롭게 산다고 가정해보세요...언젠가 그 날이 올 거예요...세계는 하나가 될 거예요.”란 가사다. 젊은이들이 자유와 평화의 갈망을, 이벽에다 존 레논 얼굴과 이메진의 가사로 표출하기 시작했던 것.

이 벽 그림의 시초는 1968년 ‘프라하의 봄’시민혁명이 불발로 끝난 후다. 당시엔 치외법권 지역인 몰타공화국대사관 담이라 정부에서도 손을 못 썼단다. 지금은 대수도원 담인데 자유와 평화의 상징으로 더 유명해졌다. 단 하루도 그림이나 그래피티가 같은 적이 없단다. 매일매일 새 글귀와 그림의 덧칠과 지워짐의 반복이니까. 다만 존 레논 얼굴만은 항상 여러 개씩 꼭 있단다. 그는 체코공산역사에서 자유에의 간원을 표현하던 유일한 벽의 단초가 된 상징인물이니까. 일종의 신문고역할을 톡톡히 한 벽이니까. 과연 그의 노래대로 전쟁 없이 온 세계가 하나로 평화를 노래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글쎄다.

강변길에서 계단을 오르니 블타바강에 처음 생긴 다리인 바로 그 유명한 카를교다. 12세기엔 목조다리였는데 홍수로 붕괴돼 1402년 석교로 재 완공됐다. 폭이 10,3m, 길이 520m인 보행자전용다리다. 특이하게 다리가 일직선이 아닌 약간 S형이다. 양쪽에 통행료 징수 처로 지었다는 고딕양식의 교탑은 유료전망대가 됐다. 까만 가스등에다 조각상들이 양편에 15개씩 무게를 잡고 있어 박물관 이미지다. 이 석상들은 17세기말에서 20세기 초까지 300년에 걸쳐 세워졌다. 얀 네포무쿠 성인이 순교했던 자리엔 신부의 청동상이 있다. 정설처럼 5개의 별들이 원형으로 신부의 머리 뒤를 후광처럼 감싸고 있다. 사람들이 하도 기단에 새겨진 신부의 부조를 만지며 소원을 빌어 그 부분은 빤질빤질 노랗다. 그 곳만 유독 군중세례라 나는 소원이고 뭐고 손만 슬쩍 스쳤다.

다리는 초상화 화가들, 다리의 악사들, 기념품 매점 등등 완전 시장 통이다. 거기다 관광객들까지 파도처럼 넘실댄다. 나는 앞으로 맨 가방만 꼭 쥐곤 물고기처럼 인파사이를 요리조리 헤쳐 나가기 바빴다. 이곳이야말로 소매치기 경계령이 내린 1호지점이니까. 하여 사랑하는 사람과 손잡고 건너면 영원히 아름다운 사랑으로 남는다는 낭만의 다리를, 나는 두려움에 빠져 긴장과만 손잡고 건넜으니, 절대 유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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