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입장 바꿔 생각해보니…’

2019-01-11 (금) 이해광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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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의 심각성을 일깨우기 위해 미국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실시한 교실 실험은 유명하다. 일명 ‘푸른 눈 갈색 눈 차별 실험‘이다. 교사는 학생들을 푸른 눈과 갈색 눈으로 나누고 푸른 눈 아이들에게 ‘너희들이 더 우월하다’고 암시를 준다. 갈색 눈 아이들에게는 수건을 씌우고 푸른 눈 아이들과 놀지 못하게 하고 점심도 조금만 먹게 하고 쉬는 시간도 짧게 주는 등 여러 면에서 차별을 했다.

그러자 실험 전만해도 잘 어울리던 아이들은 두 집단으로 갈리고 서로를 원수 보듯 했다. 심지어 푸른 눈 아이들은 갈색 눈 아이들에게 이름이 아닌 ‘야 갈색 눈아’라고 비아냥거릴 정도로 차별과 편견은 빠르게 전염됐다. 역할을 바꿨다. 갈색 눈이 더 우월하다고 암시했다. 그러자 주눅 들어 있던 갈색 눈 아이들이 기세가 등등해지며 상황이 반전됐다. 푸른 눈과 갈색 눈의 역지사지(易地思之)다. 학생들은 입장이 바뀌어보니 차별이 얼마나 나쁘고 사소한 이유로 시작되는지 깨닫게 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사자성어지만 말처럼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내 경우 최근에 역지사지를 절감했다. 지난해 말부터 건강을 위해 퇴근 후 걷기 운동을 시작했다. 일주에 사나흘 내가 살고 있는 한인타운 주변에서 다운타운 언저리까지 1시간 30분 정도를 산책한다. 산책 하면 왠지 낭만적으로 들리겠지만 주택가를 벗어나 트래픽 극심하고 터프한 운전자 많은 LA 도심의 대로를 지나는 일은 만만치 않다. 예전에는 거리를 걸을 일이 많지 않아 이렇게 힘든 줄은 몰랐다.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라도 조심할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아무리 건너시오(walk) 사인이 들어왔다고 해도 바로 걸음을 옮기면 큰 코 다친다. 횡단보도에 진입하기도 전 눈앞에서 쌩하고 우회전 차량이 지나가기 일쑤. 횡단보도 중간쯤을 지날 때는 알아서 피하라는 듯 건너편에서 좌회전 차량이 질주하기도 한다. 횡단보도를 거의 다 지나도 오른쪽에서 차량이 멈추는지 꼭 확인해야 한다. 보행자 신호등은 분명 ‘건너시오’지만 차량 신호등은 빨갛게 깜빡 깜빡하는 곳도 있다. 여기서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얼마 전에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 좌회전차량이 불과 2피트 가량에서 급정거해 십년감수했다.

보행자들에게 LA는 지뢰밭이다. 지난해 LA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사망자 200여 명 중 절반 이상이 보행자로 나타났다. 물론 이런 사고가 모두 운전자의 잘못은 아니겠지만 교통 약자인 보행자를 제대로 배려만 했어도 희생은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보행자를 본체만체 하며 달리는 차량은 살인무기나 다름없다. 운전자가 아닌 보행자로서의 역지사지 경험은 유익했다. 핸들을 잡고 횡단보도에 다다를 때는 예전보다 더 보행자들을 살피게 되고 교통규칙을 철저히 지키려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많은 사람들이 역지사지를 실천하기란 너무 힘들다고 말한다. 대부분 자신의 보호본능 때문에 이해가 걸린 문제이거나 타인과의 갈등이나 마찰이 생길 때 자신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역지사지가 너무 절실하다. 인종 간 갈등과 반목이 깊어지는 미국 같은 다문화 사회에서는 더 그렇다. 한인사회의 수많은 갈등도 역지사지로 서로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상당부분 해소될 것이라고 믿는다.

가정도 마찬가지. 백년해로 부부들의 가장 큰 공통점 중 하나는 역지사지다. 나를 포함해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도 새해에는 역지사지를 되새겨 보면 좋겠다. “우리 아이만 왜 이럴까” 한숨만 쉬고 아이를 윽박지르기보다 우리 자신도 힘겨운 사춘기를 지나왔다는 것을 기억하고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따뜻한 대화를 시작해보는 것이다.

예부터 한국의 선조들은 세상살이에서 꼭 필요한 미덕 중 하나로 역지사지를 꼽았다.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가르치셨으며 공자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고 말했다. 모두 역지사지를 두고 한 말이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역지사지는 세상의 갈등과 생활 속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을 제시해 주는 해답임에 틀림없다.

<이해광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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