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빈의 대표주자 슈테판 대성당 위엄 절로 압도당해

2019-01-0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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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가 방인숙의 동유럽 여행기⑥ 비엔나(Vienna)2부

빈의 대표주자 슈테판 대성당 위엄 절로 압도당해

쇤부른 장미정원에서

빈의 대표주자 슈테판 대성당 위엄 절로 압도당해

쇤부른 정원



빈의 대표주자 슈테판 대성당 위엄 절로 압도당해

비엔나의 마차



시청보다 먼저 건립한 오페라 하우스 유럽 3대 오페라하우스 중 하나
영웅 오이겐의 여름별장 벨베데레 궁전 대가들 걸작만나는 미술관
클림트의 ‘키스’ 원작 크기와 색깔 강렬한 인상 머릿속 남아
18세기 황실 쇤부른 궁전은 방이 1441개나…거울의 방 가장 유명


돔이 있는 오페라하우스는 웅장하면서도 예술적미가 풍성하다. 그럼에도 충격적인 속사정이 있다. 2차 대전 후 도시가 폭격으로 전부 파괴되자, 시민들의 의향을 물었단다. 시청, 국회의사당, 오페라하우스 중에 어느 걸 먼저 재건하길 원하느냐고. 그때 돌출된 답이 음악의 나라답게 오페라하우스였기에 링 도로를 조성하며 일착으로 건립했단다.
그런데 완공 후 크기만 할 뿐 예술성이 없다는 시민들의 편향적인 비난과 혹평에, 설계자가 그만 자살했단다. 인간들의 편협한 눈과 간사한 마음들이 애통한 죽음만 파생시켰다. 에펠탑도 완공당시엔 냉대 받았지만 차후 프랑스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찬밥이던 오페라하우스 역시 이태리 밀라노의 라 스칼라, 파리의 오페라하우스와 함께 유럽의 3대 오페라하우스로 인정받는다. 고귀한 생명을 잃은 인재만 아깝고 억울하다.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 추진한 행정만큼은 수준급이지만. 새삼 간곡한 민의를 저버렸던 우리 4대강의 실정이 떠올라 속상하다.

이태리어로 아름다운 경치란 뜻의 벨베데레(Velvedere)궁전이다. 오스트리아의 가우디로 불리는 가우디의 제자 훈데르트 바서의 야심작이다. 터키(투르크)의 침공을 막은 영웅 오이겐이 여름별궁으로 지었다. 옥색 지붕의 바로크와 로코코양식의 걸작이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1716년에 별궁인 하궁을 세우고 1723년에 연회장인 상궁을 지었다. 하궁은 특별전과 야외작품의 전시공간이고, 상궁은 19세기, 20세기의 회화들이 전시된 미술관이다.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모네, 고흐의 작품들이 있다.

대박은, 클림트가 그리자마자 국가에서 사버렸던, 현재는 값이 백지수표인 ‘The Kiss’원본이다. 지금까지 어떤 경우로든 익숙하게 봐왔던 그림과는 느낌이 천지차이다. 사진과 실물의 차이겠지만, 1m80cm의 대작을 부분이 아닌 전체를 다 보기 때문이겠다. 그림의 남자는 클림트 자신이고 여자는 에밀리 플뢰게로 추정된단다. 둘은 플라토닉러브 관계로 연인이자 친구였단다. 그녀가 ‘빈의 카사노바’란 별명의 클림트를 떠나자, 2년 동안 몰두해 그린 작품이다. 그림에 감동해 그녀는 그의 곁으로 돌아왔고, 결혼 안한 채 27년 간 함께하며, 58세에 뇌출혈로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사돈 간이라 결혼을 못했다는 설도 있다. 하여간 이 그림은 19세기에서 20세기 초, 본능적 삶의 탐구방향을 추진하는 아루누보 형식인, 유럽유겐트양식의 절정이다. 평생 천착한 주제인 ‘사랑하는 연인들’이 활짝 꽃피운 것으로 평가받는다. 평생 독신이었던 그에게 사후 16명의 사생아가 나타나, 에밀리가 유산을 분배해줬단다. 카사노바란 별명이 맞았나보다.

이층 전시실엔 이스라엘의 여걸을 그린, 목이 길고 나른한 눈빛의 유디트(Judith 1, 2)연작과 풍경화들이 있다. 그의 220여점의 그림 중 4분의 1이 풍경화란다. 풍경화는 그만의 독특하고 에로틱한 그림성향과는 완전 다른 분위기다. 풍경화엔 절대 문과 인물을 안 그렸다지만, 대가의 그림답게 감동이 팍 오고 마음이 끌린다. 전시실을 나와도 그의 그림 속에 두드러진 황금빛이 머릿속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그를 지칭하는 ‘황금빛의 비밀’이란 수식어가 너무나 어울리는 화가였음을 거듭 확인한 셈이다.

기념품센터엔 클림트의 그림에 관련된 각종 상품들로 꽉 찼다. 가이드가 키스그림우산이 인기라고 한데다, 마침 비도 오니까 일행 몇 명은 20유로나 주고 샀다. 밖으로 나오니 상궁과 하궁 사이 시원하게 넓은 정원엔 연못과 화단 등이 또한 압권이다.

오페라하우스에서 슈테판성당까지 이어진 빈의 명동인 케른트너(Kaerentner)거리를 걸었다. 점심으로 감자와 스프, 슈니첼(1800년대 일본인들이 먹어보고 개발한 돈가스)이다. 돈가스가 일본에서 건너온 건 알았지만 원조가 이리 멀기도 먼 곳일 줄이야. 카페나 과자상점들이 많은데 하나같이 예뻐 시식해보고 싶다. 프랑스의 크루아상과 덴마크의 데니쉬빵 원조도 여기란다. 진한 에스프레소에 우유크림을 탄 멜랑쥐(Melange)커피는 있어도, 비엔나커피라는 건 없다. 비엔나소시지도 정작 이곳엔 없다는 사실도 기억해야겠다.

마침 ‘키스’우산을 파는 곳이 많아 슬쩍 보니 값이 7유로다. 벨베데레의 우산과의 가격차이가 아리송하다. 보기엔 똑같지만 품질차이겠지 해도, 인쇄된 키스그림자체는 똑같기에 말이다. 알면 보인다더니, 키스우산들이 물결처럼 거리를 누비니 비엔나가 온통 키스로 덮인 뉘앙스다. 온 지구촌거리에도, 온 사람들 사이에도, 저처럼 키스와 사랑이 넘실대면 진정한 평화가 도래하련만, 요원한 일이다. 원시적인 카오스에서나 가능했던 헛된 환상이리라...


이슬비 오는 빈의 거리는 로맨틱하지만, 소매치기 요주의 지역에다 여행객들로 북적대 초긴장상태다. 그런 경황에 관광마차들까지 북새통이니 낭만커녕 정신만 산란하다. 빈의 대표주자 슈테판 대성당이다. 2차전 여파로 소실된 후, 1952년에 세계에서 3번째로 높은 137m 첨탑과 23만개의 벽돌로 재건축했다. 얼핏 밀라노 성당과 견주게 된다. 사암이 검게 변해 거무칙칙해도 위엄이 서려 절로 압도당한다. 지붕의 모자이크무늬와 색깔이 독특한 걸로 유명하다.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식을 치른 성당이라서 앞의 광장에 그의 동상이 있다.

성당의 북 탑과 남 탑 전망대는 유료인데 북 탑이 조금 더 비싸단다. 전망차이 때문인지, 높이차이 때문인지 나로선 알 길이 없다. Y랑 성당 안에 들어가니 경건함에 몸이 바짝 위축된다. 하이든과 슈베르트가 소년시절 합창단원으로 봉사했다니까 제단 주위가 달리 보인다. 가톨릭신자인 Y의 권유에 촛불을 밝히고 경외감에 젖어 기원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제일 크고 아름답다는 쇤부른(아름다운 샘물)궁전으로 갔다. 1619년 황제가 사냥하다가 샘을 발견했던 곳에 지은 궁전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때인 1750년에 완공된 합스부르크왕가의 여름별장이다. 그녀가 좋아해 마리아테레지아 칼라라는 노란색 건물이 엄청 길어 노란궁전으로도 불린다. 궁전후면의 언덕꼭대기엔 전쟁승리개선문이 우람하다. 넓은 광장가운데 분수와 조각상들도 정원에 아름다움을 보탠다. 파리 베르사이유 궁전을 의식해 지었다는데 규모나 화려함에선 더 하단다. 조각품과 분수는 이태리식을 본 따고, 자연 그대로를 지향하는 영국식에다, 잘 정리된 프랑스식 정원까지 융화시켜놓았으니까.

18세기 황실이라 방이 1441개나 되는데 40여개만 개방이다. 방들을 기웃거리니 왕후들이 사용하던 화장대엔 머리빗과 손거울까지 있다. 식탁엔 냅킨에다 포크와 나이프까지 세팅돼 현재도 상주하는 듯해 좀 허망하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제일 좋아했다는 ‘거울의 방’이 유명하다. 6살의 모차르트를 누나와 함께 불러 피아노연주를 하게 했던 방이라니까.

궁정입구 쪽 로즈 가든은 각종 장미꽃들의 향연이다. 넝쿨장미터널은 만개전인데도 아늑하고 매혹적이다. 우리 모두 장미와는 한참 거리가 멀어진 나이지만, S가 기념독사진들을 다 찍었다. 잠깐이나마 장미봉우리로 돌아가는 설렘을 주는 꽃 터널아래서. 정원중심에 1788년에 만든 넵튠분수가 시원한 물줄기를 뿜는다. 꼭대기에 바다의 신인 넵튠조각상도 압권이다. 궁전 옆 식물원도 옥색지붕과 건물외관이 중후하고, 꽃 종류와 온도가 다른 온실 3개가 연결돼있단다. 시간에 쫓겨 외관감상만 하고, 세계 최초의 동물원 역시 생략했다.

1차 대전 후 이 궁전에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종말을 선언했다. 또 나폴레옹의 빈 점령기엔 프랑스사령부로 쓰였고. 전쟁과 역사의 부침(浮沈)을 많이도 겪었구나 싶다. 퍼뜩 의문이 솟는다.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닌데, 왜 이런 호화스러움의 극치를 누리고자 했을까? 왕가 말년을 보면 제대로 행복을 누리지도 천수를 다하지도 못했다.

특히나 마리아 테레지아의 14자녀 중 막내딸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어땠나. 궁전에서 호사스런 어린 시절을 보냈어도, 프랑스로 시집간 후, 끝내는 프랑스혁명 시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으니까. 그래도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후대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해준 건 자명하다. 그렇다면 허황된 사치도 측면결과는 보람인가 싶기도 하지만, 총체적인 한마디로 무상이다. 헝가리로 가는 여정을 재촉하며 부지런히 버스에 올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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