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부시 전 대통령이 남긴 진짜 유산

2018-12-07 (금) 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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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의 별세 소식은 새롭지 않았다. 그가 곧 떠날 것이라는 사실은 예측 가능했다. 73년을 함께 살았던 필생의 동반자를 잃은 슬픔, 충격, 고통 그리고 그 강력한 인연의 끈이 그를 오래 이 세상에 남아있게 할 것 같지는 않았다.

4월 봄날 바버라 여사가 떠나고 11월의 끝 겨울 초입에 그가 떠났다. 17살, 16살 소년소녀로 만나 사랑에 빠진 지 76년, 부부는 명을 다하고 장구한 러브스토리는 막을 내렸다. 사람도 사랑도 고종명(考終命)이다.

‘아버지 부시’ 41대 대통령이 94세를 일기로 지난달 30일 별세하고 5일 국장, 6일 안장까지 미국의 뉴스는 온통 ‘부시’였다. 수십년 공직생활 중 거둔 공과 과가 거론되고, 개인적 성취 보다 국가를 최우선에 두었던 헌신적 애국심이 평가되고, 당파를 초월한 폭넓은 교제, 맺은 인연들에 대한 변함없는 충정이 조명을 받았다.


전직 대통령 서거에 국가적 애도는 마땅하지만 그의 겸손, 그의 품위가 유난히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시대적 상황과 상관이 있다. 미국의 기본가치가 무시되고 지도자로서의 품격이 실종된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좌절과 분노가 부시 전 대통령에 대한 칭송으로 발산된 감이 있다.

단적으로, 자신을 정계에서 퇴출시킨 시골출신 애송이 정치인에게 편지를 남겨 경의를 표한 지도자와 트윗으로 상대방을 조롱하는 지도자의 차이이다. 그리고 두 지도자 사이의 대조는 사생활에서도 극명하다.

부시 전 대통령의 공적인 업적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는 최선을 다했다하더라도 역사적 평가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유산 중 논란의 여지가 없는 훌륭한 유산은 가족 사랑이다. 평생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 좋은 할아버지로 자손들에게 가정의 소중함을 몸으로 보여주고 떠났다.

그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장기 결혼생활 기록을 남겼다. 첫 사랑과 결혼해 죽음이 두 사람을 가를 때까지 5명의 자녀를 키우고 그들 다섯 부부와 17명의 손주, 8명의 증손주 등 수십명이 가족으로 함께 둘러앉은 광경은 이제는 다시 보기 힘든 고전적인 가정의 모습이다.

미국의 대표적 정치 명문으로 민주당의 케네디가와 공화당의 부시가가 꼽히지만 두 가문 사이에는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케네디가에는 스캔들이 끊이지 않은 반면 부시가는 평온하다. 가문을 일으킨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가족 사랑이 탄탄한 기초가 된 덕분으로 짐작된다.

모든 화목한 가정의 필요조건은 부부 사랑이다. 1942년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첫눈에 반했던 ‘빨간 드레스의 소녀’가 주름투성이 목을 진주목걸이로 가리는 할머니가 되도록 그의 사랑은 한결 같았다. 아들 부시 대통령과 플로리다 주지사였던 젭 등 5남매는 자신들이 ‘동화책’ 사랑의 증인들이라고 말한다.

부시의 아내 사랑은 지극했다. 바버라 여사가 남편으로부터 받은 선물로 ‘24켤레의 운동화’를 소개한 적이 있다. 백악관에 살던 어느 날 퍼스트레이디는 “요즘은 운동화 종류가 수백 가지인데 켓즈(캔버스 천의 본래 운동화)를 찾을 수가 없다”는 말을 했다. 지나가는 말이었는데 이를 기억에 새겨둔 남편은 아내의 생일날 스타일, 색상, 무늬가 다른 켓즈 24켤레를 사들고 왔다. “다음엔 다이아몬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바버라 여사는 농담을 했었다.


최강국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에 올랐겠지만 그렇다하더라도 바버라의 남편이 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그는 말했었다.

바버라 여사 역시 92세 장수의 비결로 ‘좋은 남편’을 꼽았다. “72년 전 결혼한 남자와 나는 아직도 사랑하는 중”이라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신앙, 가족, 친구들’인데 그런 면에서 ”우리는 도에 넘치게 축복을 받았다“고 했다. 부부는 사랑했고, 사랑했으니 행복했다. 행복한 부모 밑에서 자녀들은 잘 자라나기 마련이다.

지난 4월 아내가 떠나고 휠체어에 앉아 몇시간 씩 조문객을 맞았던 남편은 장례식 끝나자마자 중환자실로 실려 갔다. 곧 퇴원은 했지만 이전부터 좋지 않았던 건강은 회복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전에는 죽음이 두려웠지만 이제는 어떤 면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손녀에게 털어놓았다. 하늘나라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난다는 믿음이다.

“슬픔 중에도 우리가 웃어야 할 것은 아버지가 지금 로빈(백혈병으로 유아사망)을 안고 어머니의 손을 다시 잡고 있을 것을 알기 때문”이라는 말로 장례식에서 아들 부시는 추모사를 끝맺었다.

평생 가족을 사랑하며 가장으로서 존경받았던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형편없는 아버지였다면 나와 젭이 공직에 나갈 생각은 안 했을 것”이라고 아들 부시는 회고했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남긴 유산이다.

<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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