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느슨한 공동체

2018-12-03 (월)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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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슨한 공동체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추수감사절 연휴 동안엔 갈 곳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대비가 극명히 일어난다. 미국에 가족이 있는 사람은 가족의 품으로, 친구가 있는 사람은 친구들 곁으로, 여행자금을 착실히 모아온 사람은 여행지로, 나처럼 가족도 친구도 돈도 없지만 할 일은 넘쳐나는 나홀로 유학생은 셔터를 내려버린 도서관 앞에서 세상 잃은 표정을 지으러.

이번 추수감사절에는 페이스북을 통해 만난 대학원생의 모임에 초대를 받았다. 하라는 연구는 안 하고 사진 찍기에 심취하거나, 막걸리를 빚거나, 스타트업을 구상하거나, 맥주 양조장에서 몇 시간을 줄 서서 기다리거나, 백종원의 고기굽기 레시피를 따라하는 대학원생들이 한데 모였다. 모임 이름도 ‘하라는 연구는 안 하고’.

에어비앤비로 집 한 채를 2박3일 동안 빌렸고, 코네티컷, 펜실베니아, 애틀란타, 서울에서 대학원생이 열 명 남짓 참여했다. 칠면조 대신 소고기를 굽고, 스터핑 대신 된장찌개를 끓이고, 그린빈 캐스롤 대신 쌈 채소 모듬을 만들어 놓고 모임 내내 이야기꽃을 피웠다.


장거리 연애의 애환, 블랙 프라이데이 노트북 최저가 정보, 찌개 잘 끓이는 법, 맛있는 맥주 정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의 비하인드 스토리, 사회과학 분야의 정서적 연구방법 팁, 연구와 사회성의 관계 등등 잡다하고 광범위한 주제를 놓고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2박3일 동안 잠은 7시간 정도밖에 자지 않은 채 계속 앉아서 이야기 나누고 먹기만 했는데, 공항에서 헤어질 때는 거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3일 내내 거의 처음 보는 사람들과 계속 붙어 있으면서도 이렇게 신나게 떠들고 놀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돌아오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대학원생이라는 공통분모만 있을 뿐이지 살아온 궤적도 배경도 너무 다 다른데.

한국 명절 때의 풍경이 갑자기 겹쳐 보였다. 지난 9월 추석 때쯤, ‘명절 잔소리 메뉴판’ 이라는 그림파일이 인터넷에 떠돌곤 했다. 잔소리를 하고 싶으면 그에 걸맞은 돈을 내라고 적어 놓은 거였다.

“애인은 있니? 연애 좀 해야지”는 10만원, “졸업은 언제 할 생각이니?”는 15만원, “나이가 몇인데 슬슬 결혼해야지”는 30만원, 잔소리 종합 패키지는 50만원 등등.

사람들은 겨울을 나는 고슴도치 같아서, 추위를 피하려고 붙어있다 보면 몸에 나 있는 가시로 서로를 찌르게 되고, 그렇다고 멀리 떨어져 있으면 체온을 유지하지 못해 추위에 떨게 된다는 쇼펜하우어의 우화가 있다. 가족이나 친척처럼 너무 가까운 공동체는 걱정이라는 명목 하에 서로를 더 찌르게 되는지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지만 정작 당사자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고, 때로는 상처가 된다.

이번 추수감사절에 모였던 ‘하라는 연구는 안 하는’ 대학원생들은 느슨하지만 살가운 공동체를 이루고 있어서 즐거운 기억만 가지고 떠날 수 있었던 거였구나, 깨달았다. 가시로 서로를 찌르지 않을 정도의 거리는 두고 있지만, 은은한 온기는 전해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

일상이 항상 서로가 서로를 찌르거나 내가 내 자신을 찌르는 나날의 반복이다. 이런 날을 보낼 때마다 느슨한 공동체 안에서 살짝 전해져 오는 온기를 받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시 맘을 추스르게 된다.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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