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억압당하는 백인남자들?

2018-11-19 (월) 김성준 콜로라도대 정치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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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당하는 백인남자들?

김성준 콜로라도대 정치학 박사과정

정치학을 가르치다 보면, 미국에는 더 이상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같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학생들을 종종 만난다. 좌파 성향의 교수들이 제대로 된 사실관계나 데이터를 제시하지도 않고 모든 사회현상에다 인종이나 젠더 문제를 투사하고 있다고 이들은 성토한다.

자기는 평생 꿈도 꿔보지 못할 엄청난 성공을 누리는 사람이 백인이 아닌 사람들 중에도, 그리고 여자들 중에도 있는데, 무슨 성차별이 있고 인종차별이 있느냐는 것이다. 게으르거나 전공 선택을 잘못해서 취직을 못하는 사람도, 형편에 비해 아이를 너무 많이 가져서 가난한 사람도, 하나같이 인종이나 젠더 탓만 한다는 지적도 한다. 공교롭게도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백인 남학생들이다.

이들은 편향되지 않은 시선으로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사태를 보려고 노력하는 자신들의 목소리가 캠퍼스에서 억눌리고 배제당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친구들의 주장에 따르면, 요즘 대학교수들과 조교들은 수업시간에 다양성이나 평등, 정치적 올바름 등 대학교육의 목적과 그리 상관 없는 정치적 가치를 지나치게 고려한다. 이 때문에 자기들같이 건강한 보수주의자들조차 수업시간에 자기주장을 당당히 펼치기가 꺼려진다고 말한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사실관계와 데이터의 중요성’,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나 ‘공정성’, ‘사상의 자유’ 같은 좋은 말들이 굉장히 주관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성별/인종별 임금격차나 승진 비율의 격차 같은 잘 알려진 통계들을 갖다 줘도, 이들은 자료집계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거나, 자기가 보는 사실이랑 다르다고 대꾸한다.

정치이론 입문 과목에서 언제나 자유지상주의나 보수주의 같은 미국 우파의 대표 이념이 최소한 각각 한 꼭지를 이루는데도, (가르칠 때도 있고 가르치지 않을 때도 있는) 페미니즘이나 인종차별 문제를 수업시간에 너무 많이 다룬다고 항의한다.

언젠가 우파의 목소리도 캠퍼스에서 대변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이들의 항의가 받아들여져서, 우리 학교는 몇 년 전부터 보수주의적 가치를 대변하는 방문학자를 꾸준히 초빙해오고 있다. 일반적인 교수직 공모에 응모하면 경쟁력이 없을 인물들이 우파적 가치를 대변하는 학자라는 이유로 일자리를 얻고 있다.

하지만 학교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기 목소리가 억압당하고 있다고 믿는 젊은 보수주의자들은 꾸준히 증가추세를 보이는 것 같다.

내 동의를 얻고 싶어서이겠지만, 차별이 없다고 주장하는 백인 남학생들은 언제나 아시아계 미국인의 눈부신 성공을 칭찬한다.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하나같이 똑똑하고 성실하냐며 칭찬하다가, 아시아계가 법조계나 과학계, 의학계에서 저렇게 성공하는 걸 보면 더 이상 미국에 인종차별은 없는 게 아니냐는 이상한 결론으로 나를 이끌고 가려고 한다.

이런 주장을 들으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기에 나는 그저 눈만 끔뻑거리게 된다. 그저 이들이 하루만 다른 피부색으로, 다른 성별로 살아봤으면 좋겠다. 훨씬 높은 점수를 갖고도 대학입시나 입사면접에서 떨어져도 보고, 괜히 까다롭게 굴거나 트집 잡는 사람들도 좀 상대하다보면, 자신들이 이제까지 누리던 특권들이 보이게 될까.

자신의 목소리가 억압당하고 있다고 믿는 백인남자들이 과거의 특권을 점점 잃고 있는 건 사실일지 모른다. 그러나 특권을 박탈당하는 건 억압이나 역차별이랑은 분명 다를 것이다.

<김성준 콜로라도대 정치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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