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떤 질문들

2018-11-1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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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법 위에 있는가? 누가 사고팔리나? 누구에게 선택할 자유가 있나? 누가 징역을 사는가? 누가 명령을 따르나? 누가 가장 길게 경례하나? 누가 가장 큰 소리로 기도하는가? 누가 먼저 죽나? 누가 최후에 웃는가?”

LA 다운타운의 템플과 알라메다 스트릿 인근, 현대미술관 모카 게픈(MOCA Geffen) 전시장의 외벽에 쓰인 글이다. 성조기 형태로 붉은 바탕에 흰색 대문자로 쓰여 있어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확연히 끄는 이 벽화는 개념주의·페미니즘 아티스트인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의 작품 ‘무제(질문들)(1990/2018)’이다.

한 눈에 보아도 제도와 권력에 저항하는 9개의 질문들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1990년 모카의 위촉으로 제작한 벽화로, 당시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을 시작하자 거리에 성조기 물결이 휩쓰는 것을 본 작가가 전쟁과 미국의 미래를 염려하며 만든 작품이다.


게픈 전시장의 남쪽 벽에 2년 동안 전시됐던 모카의 기념비적 작품인 이 벽화가 지난 10월20일 다시 등장했다. 이번에는 게픈 건물의 북쪽 벽에 처음보다 훨씬 큰 사이즈(30x191피트)로 재현됐다. 모카 미술관은 작품 재설치를 기념해 중간선거의 유권자 등록 캠페인을 펼쳤으며 이 벽화는 다음 대선이 끝나는 2020년 11월30일까지 전시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메시지는 분명하다.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에 대한 비판이다. 재설치 과정을 지켜본 바바라 크루거 작가는 “이런 이슈들이 아직도 울림을 준다는 사실이 슬프고 비극적이다”라고 말했다.

이 벽화가 약 30년만에 느닷없이 재등장한 것은 지난 달 모카에 새로 부임한 클라우스 비젠바흐(Klaus Biesenbach) 관장 때문이다. 그는 크루거의 ‘무제(질문들)’가 모카의 역사와 이 도시에서의 역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평가하고 자신의 첫 프로젝트로 벽화의 재설치를 추진한 것이다.

서독 출신으로 10여년간 뉴욕의 현대미술관 모마(MoMA PS1)를 성공적으로 운영해온 비젠바흐는 “뮤지엄은 공적 책임을 가졌고 사회에서의 역할이 있기 때문에 용감하게 문호를 개방하고 시민들과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런 철학에 따라 모마 PS1을 뉴욕의 가장 중요한 실험적 예술 공간으로 변모시킨 그는 LA에서도 도심의 표정을 읽는 일부터 하고 있다. 유권자 등록이 바로 그 첫 신호탄이었으며 이런 행보가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모카는 세계에서도 첫 손가락에 꼽히는 현대미술관이지만 재정과 경영 문제로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어왔다. 재정이 악화돼 한때 라크마(LACMA)와의 합병설이 나오기도 했고, 골통보수 백인 이사진의 횡포로 두명의 관장(제프리 다이치와 필립 베른)이 임기를 못 채우고 물러나야 했으며, 현대미술계의 최고 실력자들로 존경받던 큐레이터들을 잇달아 해임, 안팍으로 크나큰 원성을 사기도 했다.

새 관장 클라우스 비젠바흐의 취임에 미술계 인사들이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바로 며칠 전에는 다양한 배경의 새 이사 5명의 선임 발표도 있었다. 모카의 갱생과 회생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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