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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새 날이 밝다

2018-11-09 (금) 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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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파도’ ‘푸른 쓰나미’로 전망되던 2018 중간선거가 끝났다. 트럼프 행정부에 분노하며 민주당으로 표가 몰릴 것으로 기대되던 거센 파도나 쓰나미는 없었다. 대신 푸른 ‘물결’이 있었고 물결의 주인공은 대부분 여성, 소수인종·민족, 성소수자 등 이 사회의 비주류들이었다.

정확히 10년 전 미국은 역사를 새로 쓰는 이정표적 사건을 맞았다. 40대의 흑인 정치인, 버락 오바마가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수백년 노예로 부려지고, 노예제도 철폐 후에도 다시 100여년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었던 흑인이 백악관의 주인이 된 것이다. 미국이 드디어 인종차별의 어둡고 긴 챕터를 닫고 새로운 장, 새 날을 연다는 기대감이 높았다.

새 날은 가슴을 뛰게 했다. 흑인이 최고 통수권자가 되는 기적 같은 일은 1950년대 로사 팍스 여사의 용기있는 저항, 1960년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카리스마 넘치는 민권운동의 결실로 인식되었다. 팍스 여사는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라는 백인승객의 요구를 거부해 체포되었고, 이를 도화선으로 시작된 흑인들의 승차거부 운동은 킹 목사의 민권운동을 불붙이며 역사적 워싱턴 행진으로 이어졌다.


“1955년 로사 팍스가 앉았고(sat), 1963년 마틴 루터 킹이 걸었으며(walked), 2008년 버락 오바마가 후보로 뛰었다(ran), 이제 우리 아이들은 날아오르게(fly) 될 것.”이라는 이메일이 당시 신바람 나게 돌았었다. 차별 없는 세상이 도래했다는 감격의 메시지였다.
그리고 10년, 역사는 책장 넘기듯 쉽게 넘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피부로 체험하고 있다. 적어도 레이건 행정부 이후 근 40년 동안 이민자, 유색인종, 무슬림, 성소수자 등 사회의 소수계가 이렇게 대놓고 배척된 적은 없었다.

변화의 거대한 파도가 밀어닥치면 세상은 새로운 흐름으로써 평정될 줄 알았다. 하지만 작용은 반작용을 낳았다. 변화의 정도만큼 강한 저항이 태동되었다. 오바마 대통령 집권은 역사의 새 챕터를 쓴 의미 있는 사건이지만 상당수 국민들의 의식은 여전히 이전 챕터에 머물러 있었다. 오바마 행정부 8년은 ‘흑인인 대통령’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보수적 백인들의 정서를 자극하며 그들의 반감과 분노를 키웠다. 그 결과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다.

6일 중간선거는 ‘민주당 하원, 공화당 상원’으로 구획정리를 하면서 막을 내렸다. 트럼프의 반이민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정책들에 분노한 유권자들은 민주당으로 몰렸고, 반이민과 인종차별을 불사하는 트럼프의 강력한 ‘미국 우선주의’에 열광하는 유권자들은 공화당으로 몰렸다. 분열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한편 작용은 언제나 반작용을 낳는다. 근 2년 트럼프 대통령의 밀어붙이기식 통치는 그만큼 도도한 저항의 흐름을 키웠다. “이대로 있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여성, 이민자, 소수인종·민족, 성소수자 등 비주류들의 정치참여 의식을 자극했다.

그들이 대거 선거에 출마해 ‘최초의 여성’ ‘최초의 무슬림’ ‘최초의 소말리 난민’ ‘최초의 미국원주민’ ‘최초의 공개적 동성애자’로서 주지사가 되고 연방의원이 되면서, 각 소수계 커뮤니티의 새 역사를 쓴 것이 이번 선거의 가장 주목할 현상이다. 이들 ‘최초’의 주인공 대다수가 여성이며 민주당이라는 것이 공통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의도하지 않게 미국 정치사에 기여한 부분은 여성들의 의식화이다. 정치에 무관심하던 여성들을 “이건 아닌데~”하며 좌절하게 하고, “이럴 수는 없다”고 분노하게 하며, “뭔가를 해야 겠다”고 풀뿌리 운동에 참여하도록 불을 붙여준 것이 트럼프이다.

2017년 1월 트럼프 취임 바로 다음날 워싱턴에서 열린 여성 행진을 기점으로 여성들의 정치참여 운동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많은 경우 동네 엄마들 모임, 이웃모임이 민주당 여성후보를 위한 기금모금, 전화유세를 돕는 자원봉사 단체로 발전하거나 트럼프 정책 반대 전국운동에 접목되었다.


트럼프 행정부의 무자비한 반이민 정책, 총기폭력사건들에도 여전한 총기 옹호정책, 기후변화를 부인하는 환경정책, 오바마케어를 없애려는 헬스케어 정책 등 이슈에 더해 1년 전 시작된 #미투 운동이 여성들 정치참여에 활기를 불어넣은 것은 물론이다. 거기에 더해 여성에 대한 성희롱·추행을 자랑거리로 삼는 평소 트럼프의 언행 역시 여성들의 ‘레지스탕스’ 운동에 정서적으로 기여했다.

여성들은 함께 행진했고, 후보로 뛰었으며, 선거에서 대거 당선돼 민주당의 푸른 물결을 이끌었다. 이번 선거로 연방하원은 사상 처음 ‘여성의원 100명’ 기록을 세울 것으로 기대된다. “내가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누구도 대신 해주지 않는다”는 자각, “다양한 목소리가 나와야 사회가 공정해진다”는 의식이 이 사회의 비주류들을 정치판에 들어서게 했다.

그렇게 다시 새 날은 밝았다. 10년 전 넘겨진 줄 알았던 차별의 챕터는 이제 넘겨질 수 있을 것인가.

<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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