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시민권이 뭐길래

2018-11-08 (목) 민병임 뉴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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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11월의 어느 날, 한국에서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았다. 이때부터 이민국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남편이 영주권자인 경우 아내에게 바로 영주권을 주다가 86년도인가부터 법이 수년 동안 바뀌면서 영주권자 아내 입국 시 2년간 임시영주권을 주고 그 기한 내에 정식영주권을 신청하게 했다. 거기에 딱 걸렸다.

이민국 통보대로 그해 1월에 정식영주권을 신청했더니 잘 받았다는 편지가 오고 그 편지 자체로 6개월이 연장됐다. 8월이 다 가도록 영주권이 오지 않아 이민국에 편지를 했더니 기다리라는 답장편지가 왔다.

한국에서 전화를 받은 다음날 새벽같이 맨하탄 이민국으로 신청서류 카피를 들고 갔다. 길 가에 줄서서 몇 시간을 기다려 이민국 직원을 만났더니 “인터뷰 날짜 대기 중에 있는 사람은 절대로 미국 땅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했다.


매일 이민국을 찾아갔다. 처음엔 “No way. 우편신청하면 우편으로 보내준다”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한국가족 탄원서, 담당의사 소견서 및 의사면허증 카피 등등 온갖 종류의 서류를 들고서 수퍼바이저를 만났다. 사정을 설명하자 그는 임시영주권 연장신청 용지를 주었다. 비행기 표와 핑거 프린팅 확인 절차 후 드디어 이민국 출입 10일째 된 날 10일간의 임시체류 허가증 도장을 쾅쾅 찍어주었다.

한국으로 가보니 아버지는 이미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딸이 섭섭지 않게 일주일간 옆에 있어주고는 눈을 감으셨다. 이민국과 약속한 날짜를 지키기 위해 장례식만 보고 삼우제는 치르지 못한 채 뉴욕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때, 아침마다 이민국을 찾아다니며 도대체 영주권이, 시민권이 뭐길래 이렇게 사람의 애간장을 태우나 했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불법체류자나 일시 체류비자를 소지한 외국인이 미국 땅에서 낳은 아기에게 자동으로 시민권을 부여하고 있는 제도를 행정명령으로 폐지하는 방법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이 ‘자동시민권제 폐지‘ 발언은 불법체류 이민자를 포함해 미 전국 수백만 이민자 가정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미국 시민권을 말할 때는 로마 시민권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 시대에 로마 시민권의 힘은 막대했다. 로마시민은 죄를 지어도 매 맞거나 심판받지 않았다. 피정복 민족은 노예가 아닌 로마시민으로 대우했고 의무를 다하면 시민권을 주었다. 이렇게 포용함으로써 피정복 민족 자손들은 로마 문명에 동화되어 로마의 인재가 되었다, 이는 로마가 그 넓은 제국을 통치하는 안정적인 방식이기도 했다.

20세기 초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시대에는 미국도 팍스 로마나의 개방성, 포용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세계 각국의 이민자들이 몰려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고 자손들이 미국의 인재로 성장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미국의 개방성과 포용성이 한계에 달한 것일까. 트럼프의 반이민법은 영주권자나 시민권자 아니면 미국에서 어떤 혜택도 받을 생각을 말라고 한다. 모든 국가와 민족의 평화와 안정보다는 일단 우리부터 먹고 살자가 되었다. 인종, 종교, 정치적 이념에 따른 특정 그룹을 겨냥한 증오범죄도 수시로 일어나고 있다.

변해가는 미국에서 살자면 먼저 체류신분부터 확실히 하는 것이 급선무다. 또 당신이 시민권자라면 미국시민의 첫 번째 권리, 즉 투표를 포기해선 안 된다. 이 한 표가 미국이 올바로 가는 방향을 잡는데 기여할 수 있다.

<민병임 뉴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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