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느 주민센터 탐방기

2018-10-27 (토) 한수민 국제 로타리 커뮤니케이션 스페셜리스트
작게 크게
최근 한국엘 다녀왔다. 미국에서 살아온 세월이 오랜 탓일까, 한국에 다녀올 때마다 내가 나고 자란 익숙한 곳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언어만 같다뿐이지 전혀 생소한 곳을 방문한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나고 자란 집이며 동네, 학교 등 무엇 하나 예전의 추억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심지어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정서마저도 어떤 때는 뜨악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떠나있는 30여년 동안 조국은 그야말로 압축성장을 이루어냈고, 내게는 탐구 대상인 신천지로 변했으니 이번에도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떠났던 터였다. 특히 이번에는 어머니가 2년 전 낯선 동네로 이사를 하신 탓에 인천공항에서부터 집을 찾아들어가는 것부터 만만치 않았다.

어머니가 새로 이사하신 곳은 서울의 북쪽 종암동인데,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지만 거의 인연이 없던 동네였다. 어머니 집에 머물면서 며칠 동안은 동네가 생경하고 별로 정이 안 갔었는데 마침 인근에 주민센터와 도서관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말로만 듣던 지방자치 행정의 이모저모를 구경할 수 있겠다 싶어 들어가 보았다.


들어가 보니 5층 건물에 1층은 80년대 동회로 불리던 주민센터가 자리하고, 2층에는 강당과 회의실, 3층에 북카페와 문화원 교실, 4층과 5층에 도서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3층 복도의 게시판에 덕지덕지 붙은 공고를 보니 마을 주민 기자단 모집과 주민 배우 모집이 눈길을 끈다. “오호, 바야흐로 지역 공동체가 활성화된 것인가” 하는 감탄을 하고 있는데, 복도 끝 교실에서 느닷없는 굿거리장단의 태평가가 들려온다.

호기심에 이끌려 교실 문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한 30대 여성이 나왔다. “어떻게 오셨냐?”는 질문에 “그냥 구경하러 왔다”고 답하니 “들어오시라”며 덜컥 손목을 잡아끌고 교실로 들어간다. 따라 들어간 국악 교실에서 젊은 엄마들 틈에 끼어 낮아 “닐리리야”를 부르다 보니 얼굴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어린 시절 국악 프로그램을 보고 “세월이 좋아지니 기생들이 테레비에 나왔다”고 일갈하시던 친척 아주머니의 얼굴이 떠오를다. 이번에는 “세월이 좋아지니 젊은 여편네들이 기생이 되지 못해 안달이 났다”고 하실 텐가.

다음 순서는 4층과 5층의 도서실. 4층의 유아 도서실을 돌아보고 5층 청소년 도서실로 향했는데, 그 곳에서 그만 지금까지의 흐뭇했던 느낌이 싹 사라져 버렸다. 그 곳에는 고등학생들의 논술 교육을 위한 전집류들이 많이 놓여 있었는데, 대부분 ‘한국 대표 작가들의 교과서 수록작품을 간추려 서울대 교수진이 내놓은 통합 논술 교재’와 같은 긴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나는 사실 그 때까지만 해도 18종에 달하는 한국 주요 작가들의 작품이 중고교 교과서에 요약 혹은 발췌되어 실린다는 사실도 몰랐거니와(사실 이것부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논술에 대비해 이렇게 친절한(?) 교재들이 나와 있을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 교재들은 한결 같이 교과서에 실린 작품들을 토막 내어 분석하면서 주제가 무엇이고 갈등은 무엇이며 나아가 이 작품에서 독자가 느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단칼에 정리해 주고 있었다. 작가 입장에서 보면 문학은 사라지고 입시를 위한 몇 줄의 문장만 남는다는 점에서 마뜩찮은 일일 테지만, 독자나 자녀를 키우는 학부모의 입장에서도 “이건 아니다”라는 거부감이 밀려들었다.

나는 문학작품을 읽는 것은 영혼과 영혼의 만남이며, 이러한 만남은 지극히 개인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교육 행정가들의 머릿속에는 학생들에게 사고의 다양성을 길러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아예 없었던 것일까. 이들 작품이 학생들이 꼭 읽어야 할 작품들이라 판단했다면, 일률적으로 교과서에 수록해 입시 풀이 문제로 전락시키는 방법 말고 다른 대안은 없었을까. 차라리 권장 도서로 지정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읽게 하거나, 학급별 혹은 그룹별 토론을 통해 선택한 작품을 읽게 할 수는 없었을까. 이 모든 과정이 그 자체로 하나의 소중한 교육 체험이 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번 방문도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하며 끝이 났다. “이만큼이나 발전했구나”하는 생각과 “아직 갈 길이 멀구나” 하는 생각. ‘다이내믹 코리아’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한수민 국제 로타리 커뮤니케이션 스페셜리스트>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