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그들의 절망, 우리의 두려움

2018-10-26 (금) 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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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독일의 2인자였던 헤르만 빌헬름 괴링은 사람의 심리를 잘 간파했다. 전쟁에 반대하던 독일국민들이 어떻게 열광적으로 전쟁을 지지하게 되었는지를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간단하다. 우리가 공격당하고 있다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 평화주의자들은 애국심이 부족한 자들, 나라를 위험에 빠트리는 자들이라고 비난하기만 하면 된다. 이건 어느 나라에서나 통한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싹트게 만들라는 것, 두려움이 선동의 불쏘시개가 되어준다는 말이다. 국민의 두려움은 독재자의 정권유지 기반이자 선거철 표심 장악의 수단이라는 사실은 ‘주적’ 북한과 70년을 살아온 한국민에게도 익숙하다. 선거철이면 ‘북풍’이 불곤 했다.


중간선거 10여일을 앞두고 분위기가 바뀌었다. 민주당의 승리가 당연한 듯 점쳐지던 블루 웨이브가 주춤하고, 공화당 세가 살아나고 있다. 이전의 ‘민주당 압승’ 전망도, 지금의 바뀐 판도도 주원인은 트럼프 대통령이다. 한때 공화당 후보들이 노골적으로 거리를 두던 트럼프는 지금 ‘발이 닳도록’ 유세장을 돌며 공화당 표심을 달구고 있다. 물 만난 고기처럼 그는 에너지가 넘친다. 공격할 ‘적’들이 나타난 것이다.

2016년 대선 당시 “범죄자 불법이민들, 테러리스트 무슬림들로부터 미국을 지키자, 국경에 장벽을 쌓자,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메시지로 백인 저소득층을 열광시켰던 그가 다시 같은 메시지를 들고 나왔다. 지난 12일 온두라스에서 시작된 캐러밴 때문/덕분이다.

선거에 때맞춘 듯 중미에서 7,000여명이 떼 지어 미국을 향해 올라오고 그들 갈색피부의 행렬이 연일 뉴스로 보도되자, 트럼프는 이민문제를 다시 선거이슈로 잡았다. “그중에는 범죄자들과 정체불명의 중동계가 섞여있다, 우리나라에 대한 공격이다, 국경에 군을 배치하겠다, 국가비상사태라도 선포하겠다. 이 모두가 불법이민에 느슨한 민주당 탓이다.” 라며 반 이민 정서에 불을 붙였다. 풀뿌리 기반인 보수백인들의 분노와 두려움을 자극해서 지지를 극대화하려는 트럼프식 선동 전략은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선거의 승패를 가를 무당파 유권자들이 어떻게 마음을 정할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다른 나라들 나는 상관 안한다, 나는 미국의 이익만 챙긴다”는 트럼프의 미국제일주의를 지지할 수도 있고, 글로벌 리더로서 미국의 책무와 품격을 중시할 수도 있다. 글로벌 리더라는 의식이 있다면 국경을 향해 올라오는 이주난민들에게 무작정 가혹할 수만은 없다.

난민문제가 2차대전 이후 가장 심각한 인도적 위기가 되고 있다. 시리아 내전을 비롯한 전쟁, 가난, 폭력을 피해 중동, 아프리카, 중남미 국가에서 목숨 걸고 탈출하는 숫자가 사상 최고 수준이다. UN 통계에 의하면 자국 내 피난민이 4,000만, 국외 난민이 2,500만에 달한다.

밀려드는 숫자가 엄청나니 난민들에게 관대했던 유럽의 국가들도 점차 국경을 봉쇄하는 추세이다. 특히 독일은 2015년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개방정책으로 시리안 난민을 오는 대로 받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난민이 매년 수십만명씩 밀려들자 처음의 관용은 분노와 두려움에 밀리고, ‘어머니 메르켈’의 정치적 입지도 흔들리고 있다.

7,500명으로 추산되는 중미 이주자들의 행렬에 우리는 마음이 편치 않다. 저렇게 떼로 밀려들면 이 사회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하는 불안과 두려움이 생기는 게 사실이다. 숫자가 주는 공포심이다.


하지만 개개인의 사연을 들여다보면 그들은 삶에 지친 사람들, 절망이 깊어서 기적밖에 믿을 게 없는 사람들이다. 정부는 무능하고, 갱과 마약조직들이 판치니 폭력은 넘치고, 일자리는 없어서 ‘이대로 죽느니 뭐든 해봐야 겠다’고 나선 사람들이다.

90도 더운 날씨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길바닥 잠을 자면서 날 밝으면 걷기를 10여일. 가다보면 미국에 다다를 수는 있는 건지,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건지 …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저 눈먼 믿음에 이끌리고 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미국 대통령이 우리에게 일할 기회를 주겠지요.” “우리 모습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기를, 그래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라는 그들은 ‘자유의 여신상’이 불러 모으던 “지치고 가난한/ 자유를 숨쉬기를 열망하는 무리들”이다.

미국민 대부분은 그런 절박했던 사람들의 먼 후손이거나 증손, 손주 혹은 자녀들이다. 독일의 작은 마을에서 와서 2차대전 중 독일태생이라는 이유로 눈치 봐야 했던 이민자 집안의 3세는 지금 미국의 대통령이 되어있다.

국경수비는 엄중해야 하고 불법이민은 근절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새 삶을 찾아 모여드는 무리를 모두 범법자로 매도할 수는 없다. 반이민 정서가 선동의 불쏘시개로 자꾸 이용되면 불똥은 이민자 전반으로 튄다. 트럼프가 지키려는 미국은 어떤 미국인지 이민사회는 짚어볼 필요가 있다.

<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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