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염소 소방대원

2018-10-2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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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 기념 도서관은 벤추라 카운티, 시미 밸리의 산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레이건 대통령의 일생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각종 자료와 기념품이 전시돼 있고 그가 타고 다니던 전용기 ‘에어 포스 원’과 헬기 ‘머린 원’도 있다.

이곳에서는 종종 특별 전시회도 열리곤 하는데 얼마 전 징기스칸과 몽골의 역사를 다룬 기획전이 있었고 요즘은 베스비우스 화산 폭발로 한 순간에 사라진 폼페이 사람들의 일상을 조망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이외에도 이곳 방문자들의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있다. 운 좋으면 볼 수 있는 수백 마리 염소 떼다. 이들은 도서관 주변의 잡초들 사이를 뛰놀며 바짝 마른 나뭇잎과 풀들을 깨끗이 먹어 치운다. “도서관 주변에 웬 염소?” 할지 모르지만 이들은 야생 동물이 아니라 벤추라 소방국이 산불을 막기 위해 투입한 소방대원들이다. 벤추라 소방국은 정기적으로 이들을 풀어 산불 발생 시 연료 역할을 하는 잡초를 제거하고 있다.


해마다 가주에서는 평균 6,000건의 산불이 발생한다. 작년 10월 나파 밸리 일대에서 일어난 ‘텁스 산불’은 가주 사상 최대 규모로 건물 5,600채와 산림 3만6,000에이커를 태웠다. 이로 인해 22명이 사망하고 12억 달러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이 산불이 발생한 인근 지역에 ‘사파리 웨스트’라는 야생 동물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산불로 동물들이 죽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기적적으로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동물원 직원들이 헌신적으로 화재 진압에 애를 쓰기도 했지만 그보다 이 동물원에 살고 있는 소와 말 등 초식 동물들이 주변 잡초들을 모두 먹어 치워 산불이 번지는 것을 막은 공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누가 처음 염소를 소방대원으로 활용할 생각을 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북가주의 수의사 브레아 맥그루와 그의 소방대원 남편인 밥이 이 분야 선구자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들은 1991년부터 버클리와 몬트레이, 말리부 등 가주 전역 산동네에 염소를 투입, 화재 예방에 앞장서고 있다. 이들이 기르고 있는 염소 수는 수 천 마리로 추산된다.

염소가 휩쓸고 지나간 지역의 산불 위험이 줄어든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들의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이들은 2주 동안 동네 잡초를 치워주는데 1만5,000달러를 받고 있다. 이들 입장에서는 어차피 돈 주고 사 먹여야 하는 염소 식량을 돈을 받으며 해결하고 있으니 일석이조인 셈이다.

산속에 있는 주택가 주변은 대부분 경사가 급한 언덕으로 중장비를 동원하기 힘든 지역이다. 그게 가능하더라도 몇 주 동안 주민들은 요란한 소음에 시달려야 한다. 이에 비해 염소들은 어떤 언덕도 쉽게 오르고 때때로 내는 염소 울음소리 말고는 매우 조용하다.

뿐만 아니라 염소는 가축 중 가장 영리한 동물의 하나다. 전문가들은 염소가 개와 비슷한 정도의 지능을 갖고 있으며 훈련이 가능하고 인간의 지시에 잘 따른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언덕기슭의 잡초 제거반으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기후변화로 가주 날씨는 갈수록 건조해지고 인구가 늘면서 주거지역은 숲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고 있다. 산불과 그 피해 규모가 늘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염소 소방대원의 활약은 앞으로 더욱 빛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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