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뱅크시 소동

2018-10-1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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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낙서화가 뱅크시(Banksy)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세계 각지의 벽과 건물을 캔버스 삼아 신출귀몰하며 순식간에(평균 35초) 기발한 이미지를 남기고 사라지는 영국의 그래피티 아티스트. 그의 그림은 인기가 너무 높아서 벽을 통째로 떼어다 비싼 값에 팔거나 전시하기도 하고, 그의 작품을 소장하려는 유명인들이 줄을 서고 있으며, 경찰이 낙서 단속을 하기는커녕 작품 보존에 더 신경을 쓰는 낙서계의 수퍼스타다.

뱅크시의 그림은 현대사회의 많은 문제들-경찰폭력, 자본주의, 소비만능, 상업주의, 난민사태에 저항하면서도 무겁거나 과격하지 않고, 누구나 웃음 짓게 만드는 익살과 유머, 메시지와 풍자를 담고 있어 사람들이 열광한다. 낙서를 예술로 승격시킨 스트릿 아티스트로서 전세계 수많은 낙서화가들이 영웅으로 모시는 이유다.


그 뱅크시가 얼마 전 사고를 하나 쳤다. 10월초 한주 내내 세계 미술계와 경매시장이 호떡집에 불난 듯 시끄러웠던 ‘뱅크시 자해소동’.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5일 런던의 소더비경매장에서 뱅크시의 2006년 작품 ‘풍선을 든 소녀’(Girl With a Balloon)가 140만달러에 팔렸다. 추정가의 5배였으며 낙찰자는 전화로 경매에 참여했다. 그런데 경매인이 낙찰봉을 내려치는 순간 액자에 들어있던 그림이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오더니 절반이 파쇄되면서 찢어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깜짝 놀란 사람들의 모습과 경매소 직원들이 황급히 액자를 내리는 동영상이 수많은 언론과 미디어를 타고 일파만파 퍼져나갔음은 물론이다.

바로 그 직후, 뱅크시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자신의 소행이라고 밝혔다. 작품이 언젠가 경매에 부쳐질 것에 대비해 12년전 액자 속에 파쇄장치를 설치했고, 이날 낙찰된 순간 원격조종으로 작동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프레임 속에 파쇄기계를 설치하는 동영상을 공개했으며 “파괴하려는 욕망 또한 창조의 욕망”(The urge to destroy is also a creative urge)이라는 피카소의 말까지 인용했다.

경매소가 발칵 뒤집어진 것은 당연하고, 어디까지 진실이고 무엇이 의심스러운지, 그림은 어떻게 될 것이며 구매자는 이를 취소할 것인지, 온갖 추측과 뒷담화가 피어올랐다.

사실 의심스러운 점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림을 판 사람과 산 사람 모두가 익명이고 전화로 응찰했다는 점, 뱅크시 작품이 그날 마지막에 나와 다른 경매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점, 액자가 엄청나게 두껍고 무거운데도 평소 액자 점검에 철저한 소더비가 그대로 갖고 나온 점,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옆쪽 벽에 붙여놓아 파쇄장면이 쉽게 보이도록 한 점, 다 잘라버리지 않고 절반만 자른 점 등등 ‘짜고 친 고스톱’ 아니냐는 의심이 생기는 것이다.

사건 일주일 후인 12일 소더비는 이 작품을 낙찰 받은 여성 고객이 구매를 취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그녀는 처음에 충격을 받았지만 이 작품이 미술역사의 한 조각이 될 것이라 생각해 구매를 확정했다는 것이다. 한술 더 떠서 소더비는 “뱅크시는 작품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창조했다”며 ‘경매장에서 탄생한 최초의 예술작품’이라고 주장했다.
황당한 것은 뱅크시 작품의 인증기관(Pest Control)이 이 그림에 ‘쓰레기통 속의 사랑’(Love is in the Bin)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고 인증서를 발행했다는 사실이다.
이건 코미디일까, 사기일까? 거대 미술자본과 예술 상업화에 반기를 들고 30년간 철저히 얼굴 없는 길거리 미술가로 남아있던 뱅크시가 이 무슨 영악한 퍼포먼스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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