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법부 장악하기

2018-10-10 (수)
작게 크게
미국 공화당은 노예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당이다. 1860년 링컨이 초대 공화당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이기면서 남부 노예주들의 지지를 받던 민주당은 오랜 세월 맥을 쓰지 못했다. 남북전쟁 후 장장 7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민주당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사람은 그로버 클리블랜드와 우드로 윌슨 단 2명뿐이며 그나마 윌슨이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공화당 내분으로 2명 후보가 나와 표가 갈렸기 때문이다.

이런 공화당 천하가 끝난 것은 1929년 주가 폭락과 함께 찾아온 대공황 때문이다. 허버트 후버가 이끄는 공화당 정부가 사상 최악의 경기 불황 속에서 우왕좌왕하며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지 못하자 미 국민들은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즈벨트에 몰표를 주는 것으로 답했다. 행정부와 의회를 장악한 루즈벨트는 ‘뉴딜’이라는 이름으로 과감한 개혁정책을 밀어붙였으나 이는 사법부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대부분 공화당 대통령이 지명한 연방대법관들은 의회가 통과시키고 대통령이 서명한 개혁법안들을 헌법에 어긋난다며 무효화시켰다. 이에 분노한 루즈벨트가 밀어붙인 것이 1937년의 사법부 개혁 법안이다. 1936년 대선에서 압승한 루즈벨트가 제안한 이 안은 연방대법관이 70세 6개월이 넘어도 자진해서 판사직을 물러나지 않을 경우 대통령이 최고 6명까지 연방대법관을 추가로 지명할 수 있게 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연방대법원이 지금처럼 9명의 판사로 이뤄진 것은 1869년 사법부법이 통과되면서부터다. 연방헌법은 대법관 수를 몇 명으로 하라는 규정이 없다. 따라서 루즈벨트는 판사수를 얼마로 하느냐는 대통령과 의회의 고유 권한으로 본 것이다.

법적으로는 맞을지 몰라도 사법부를 정권 취향에 맞는 인사로 채우겠다는 발상은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 일각과 여론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민주당이었지만 이 법안에 반대한 헨리 애셔스트 연방상원 법사위원장은 장시간 이 법안을 심의조차 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 이 법안 지지자인 조셉 로빈슨 연방상원 다수당 원내총무가 갑자기 죽으면서 통과는 무산됐다.

법안은 죽었지만 루즈벨트의 뜻을 알아들은 연방대법원은 뉴딜 법안에 위헌판결을 내리는데 소극적으로 변했다. 과거 최저임금제가 위헌이라고 주장하던 오웬 로버츠 판사가 돌연 선회하면서 워싱턴 주 최저임금제는 합헌이라는 판결이 나왔다. 루즈벨트는 법안 통과에는 실패했지만 대법원 장악에는 성공한 셈이다.

극심한 논란 속에 지난 주말 연방상원 인준을 가까스로 받은 브렛 캐버노 연방대법관이 이번 주 업무를 시작했다. 이로써 연방대법원의 균형추는 보수 쪽으로 확실히 기울었다. 연방대법원의 보수파 장악은 공화당이 60년대부터 꿈꿔온 숙원 사업이다. 낙태와 동성결혼 합법화에 반대하는 사회적 보수파와 각종 규제완화와 노조 발언권 약화를 주장하는 경제적 보수파들이 한결 같이 원하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아무리 백악관과 의회를 장악해 법을 만들어 봐도 연방대법원이 위헌 판결을 내리면 헛일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민주당 성향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85세, 스티븐 브라이어는 80세로 고령인데다 긴즈버그는 두 번이나 암수술을 받았다. 공화당이 의회와 백악관을 쥐고 있는 현재 이 두 명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앞으로 한 세대 동안 연방대법원은 보수파의 손 안에 놓이게 된다. 공화당의 환성과 민주당의 한숨이 들리는 듯하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