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을 연서

2018-10-09 (화) 고명선/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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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둥실 떠다니는 흰 구름을 보고 어떤 이는 솜털 같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동물의 형상 같다고 말한다. 무심하게 흩어질 구름에도 불리는 이름이 있듯이 사람이나 사물에는 이름이 붙게 마련이다.

겉모습 따라 되는 대로 붙여진 이름도 있고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다듬어진 이름도 있다. 그 중에도 귀히 여겨져야 할 이름이 사람 이름이 아닐까 싶다.

수용시설은 편의상 이름 대신 부호와 숫자를 사용한다. 숫자와 부호가 요양원에 계시는 엄마의 이름을 대신하고 있다. 자신의 이름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환자들은 숫자가 새겨진 팔찌를 손목에 차고 지낸다. 급한 일이라도 생기면 간호사는 손목의 고유번호부터 확인하고 다음 일을 진행한다.


요양원에 노인을 맡긴 가족들은 몇 안 되는 개인 소지품에 일일이 숫자를 적어서 직원들이 쉽게 일할 수 있게끔 하고 있다. 날이 쌀쌀해져서 엄마가 입으실 두툼한 옷을 사왔다. 하루 중 많은 시간을 휠체어에 앉아 보내는 엄마가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을 고르느라 신경을 많이 썼다. 딸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하신 듯 엄마의 눈과 입가에는 미소 가득했다.

새로 사온 옷가지 모자, 신발, 양말에 엄마의 이름 대신 숫자를 새긴다. 선이 굵은 매직펜으로 쓰지만 하얀 양말에는 검은 실로 박음질하고 투박한 신발에는 하늘색 매니큐어로 숫자를 적는다.

중학교 시절 옆집 사는 윤선이는 리틀엔젤스 단원이었다. 빨간 원피스에 상앗빛 망토와 베레모를 쓴 소녀들이 합창하거나 한복에 장구를 메고 부채춤 추며 공연하는 모습은 그 시대의 상징이었다. 세계를 무대로 공연하러 다니던 그 친구의 속옷이나 소지품에도 친구의 이름이 기계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어느 날 장구채와 코 버선에 새겨진 친구의 이름을 보던 엄마는 “중학생이 제 물건도 못 찾을까봐 일을 만들어서 하고 있네” 라고 중얼거렸다. 또래 딸을 가진 엄마의 질투를 훔쳐보며 나는 태연한 척했다. 엄마는 그때 일을 기억이나 하실까.

며칠 전 요양원을 방문했을 때 엄마는 더는 쥘 것도 놓아버릴 것도 없는 빈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아주며 웃음으로 맞았다. 꽃구름도 빠르게 사라져간 가을 하늘의 붉은 노을 찍어다가 숫자나 부호 아닌 엄마의 이름을 가을 연서처럼 내 가슴에 꾹꾹 눌러 적어야겠다.

<고명선/수필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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