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225)흑인폭동들과 백인청소년들의 반사회적 반발 (하)

2018-09-21 (금) 조태환 /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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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lcolm X 는 Mecca 에 순례를 다녀온후 진정한 Moslem 은 “모든 인종이 동등하다” 라고 믿는다고 말하면서 모든 백인들이 악마이다 라는 Black Muslim 의 교리를 배척하고 그 자신의 조직을 만들었다. 그는 King 목사의 평화주의를 계속 비난 하였으며 폭력적 수단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었다. 그는 1965년 2월에 그를 반대하는 흑인들에 의하여 암살되었으나 그의 사후에 출판된 그의 자서전은 흑인들에게 백인혐오와 흑인자부심을 불어 넣는데에 성공하였다.

1966년 여름은 북부 여러주들의 대도시들에서 폭동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남부에서는 연방군의 보호아래 Mississippi 대학교를 졸업했던 James Meredith 가 흑인들이 백인들의 폭행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Tennessee 주의 Memphis 에서 Mississippi 주의 Jackson 까지 209 마일을 도보행진을 시작하였다. 중도에 그는 총탄을 맞고 부상되었었다. 이 사건은 일부 흑인 지도자들이 아마 King 목사보다는 Malcolm X의 주장이 더 맞는 현실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었다고 한다.

이무렵 젊은 흑인 과격주의자 Stokely Carmichael 같은 사람들이 등장하여 “사랑과 인간적인 형제애”를 역설하던 King 목사등을 비난하며 흑인들이 단결하고 자력으로 힘을 내도록 해야한다는 Black Power 라는 이념을 주장하여 흑인들의 분열이 더 심해졌으며 일부 Black Power 주의자들은 복수를 위한 흑인폭행을 역설하기도 하였었다.
1966년 가을에 이르러서는 민권운동은 내부 분열로 결속력이 도리어 약해졌으며 백인들의 반동은 더욱 활발해졌으며 민권법안들이 국회에서 쉽게 통과되지 않기 시작 하였다. 1967년 여름에는 미국 역사상 가장 격렬한 흑인폭동들이 Newark 와 Detroit 등지 에서 일어나 흑인들이 흑인지역을 파괴하고 방화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Detroit에서는 43명이 사망하고 5천명의 흑인들이 방화로 집을 잃었다. 쏘련의 Pravda 지는 폭동진압차 동원된 주방위군들의 tank 가 Detroit 시내를 순찰하는 장면들을 대서특필 했었다고 한다.


1967년에 LBJ 는 새 민권법의 입법을 요청 하였으나 국회는 아무법도 통과시키지 않았었고 LBJ 는 Thurgood Marshall 을 최초의 흑인 연방대법관으로 임명하는것 이외에는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1910년대와 20년대에 미국에서 출생 하였거나 어린 나이로 부모를 따라 이민온 사람들은 청소년기에 공통적으로 “대공항”을 경험 했었다. 5, 6년간의 혹독한 궁핍함을 몸소 경험하였던 새대의 사람들은 그때의 절박했던 생존의 두려움에서 평생을 불안하게 살았었다. 그들은 인생이란 까딱하다가는 처절한 곤경에 빠져들수도 있는 위기속에서 사는것이며 재산은 항상 최대한 절약해서 써야하며 여유가 있을때에 저축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철측을 생리적으로 배웠던 사람들이었다. 이 세대의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것은 부모로 부터 받은 유산이 아니었고 쪼개고 쪼개어서 단칸방으로 시작한 오두막을 살아오면서 형편이 조금씩 나아질적마다 칸을 늘여서 자식들을 기르고 살아온 심리적인 자린고비들이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동차는 물론이고 TV, 냉장고 심지어 라디오 한대라도 물려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로써 년도가 바뀌고 새 model 이 나와도 아까워서 헌것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생활철학이 “건전”하고 가진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하며 감사하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대도시에서는 Hippie 들이 방황하고 대학교들에서는 SDS 가 동맹휴학을 주도하던 시절
그러나 소위 baby boom 시대라고 불리웠던 제2차 세계대전 말기와 전후에 폭발적 으로 많이 출생하였던 백인 아이들은 출생 할때부터 미국이 가장 경제적으로 호황이었던 시절에 태어났던 까닭에 넓은저택, 큰 자동차, TV, Hi-fi, stereo, Super Highway, Supermarket 속에서 태어났으며 모든 물건은 년도가 바뀔적마다 새로 바꾸어야 한다는 사회규칙을 지키며 자랐었다. 가지고 있는 모든것들은 부모가 당연히 마련해 주어야 하는 것인데 항상 갖인것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불만속에서 자라왔다.
재산은 있는대로 우선 다 쓰고, 모자라면 credit 으로 앞당겨서 쓰는 것이지 저축이란 답답한 부모세대의 구닥다리 “철학”이었고 부모란 전통을 고집하는 사회처럼 도대체 대화가 통하지 않는 존재 들이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함께 시작된 핵전쟁 위협과 냉전의 긴장속에 지내는 가운데 전세계인들이 새세대의 젊은 기수라고 기대했었던 Kennedy 대통령이 암살되는 것을 보았으며 미국의 젊은이들은 미국이 왜 참전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월남에서 수만명이 죽어가고 있었다. 물질적인 풍요로움 속에서도 사회정의나 평등은 충분히 이루어 지지 않고 있었으며 차별에 항의하여 전국 도처에서 흑인들이 폭동들을 하는것을 보았다.

숫자로는 많지 않았었지만 일부의 중산츰 백인 청소년들은 이 혼돈속에서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생업을 배워야할 나이에 일반사회에서 탈락하고 모든 사회의 권위에 도전하고 사회혼돈의 책임이 부모들과 선생님들에게 있다고 성토하며 반사회적 행동들을 시작 하였다.

이들은 마약등을 사용하고 머리를 완전 삭발하거나 길게 기르고 낡은 군복을 제복처럼 입고 다니며 코걸이, 귀걸이를 하고 싸구려 묵주 목고리를 걸고 다니면서 소속 불명의 “인도” 종교를 흉내내며 얼굴에 염색하고 다니면서 대로에서 “Hare Krishna …” 등등의 주문을 외우면서 시내를 돌아다녔었다. 미국 원주민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도 이해 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인디안”처럼 단순하게 살고 싶다면서 인디안 복장을 흉내 내고 다니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신문에는 그들의 행적들이 자주 보도되었으며 지나가는 시민 들에게는 심심찮은 구경꺼리 이기도 하였었다.

1967년에 이르러서는 뉴욕의 Washington Square 공원은 이들 Hippie 로 24시간 넘쳐 흘렀었다. 이들의 행동들이 매우 사회전통들에 거슬리는 것이기는 하였지만 이들은 폭력적이지는 않았었다. 전국적인 조직같은것은 없었고 각지역별 소규모 집단들이 었었다. 이들은 대게 중산이나 중하층 백인시민들의 자녀들로 교육수준이 별로 높지 않았던 사람들이 었었다고 생각된다.
차라리 숫자는 Hippie 보다는 훨씬 더 적었지만 미국의 여러 대학교에서 꾸준히 난동을 부려왔던 소위 New Left 라고 자처했던 SDS (Students for Democratic Society) 가 더 깊고 넓은 영향을 남겼었다고 생각된다. SDS 역시 대학 단위의 반체제, 반월남전 시위등의 활동을 하였었으나 전국적인 학생연합회등의 조직은 없었었다. 그러나 Harvard 같은 명문대학교 에서도 일부 유명교수들까지 학생들과 함께 어울려 철이 들지않은 사람들 같은언동을 하여서 사회적 빈축을 받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미국을 개혁할 민주주의 신봉자들이라고 자처하였으나 그들의 행동이 민주적이 아니고 무정부주의자들 같다는 비난을 받았었다. 그들은 소위 “Establishments” 들이 미국의 병폐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정부, 대학교, 교수, 부모들을 싸잡아 비난하면서 학교내에서 쌍욕을 지꺼리고 다니며 강의를 중단시키는 행동등을 하였다. 그들은 Student Powers 라는 것을 요구하였다. Malcolm X 나 Cuba 의 Che Guevara 가 영웅이라고 주장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1964년에는 Berkeley 에 있는 명문대학교 University of California 에서 학생 동맹휴학 이 있었는데 그후 다른 대학교들에서도 동맹휴학들이 일어났었다. 가장 격렬했던 휴학은 1968년 봄에 Columbia University 에서 일어났는데 학생들이 교무처를 장악하여 교수들의 논문들을 불살라 버리고 대학교의 정책결정에 학생들이 참여할수 있도록 요구하였었다.

그무렵 흑인여자교수의 연구실 문 손잡이에 흑인 lynching 을 상징하는 교수형 노끈을 걸어 놓아서 사회적 규탄을 받기도 하였었다. SDS 는 흔적도 남기지 않은채로 서서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조태환>

<조태환 /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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