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경쟁이 아닌 시험

2018-09-17 (월)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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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이 아닌 시험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2007년 무더운 8월, 아빠 차를 타고 낯선 동네 고등학교에 도착했다. 내리자마자 바로 마주한 건 학원 광고물을 단 봉고차 여러 대였다. 두리번거리면서 입구를 찾던 내겐 어느새 학원에서 나눠준 광고물과 요약본이 한움큼 들려 있었다.

열여섯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가지 않았다. 중학교 때의 칼단발 학칙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머리카락은 겨우 어깨에 닿았다. 그렇게 검정고시 시험장 교실에 들어갔다.

내 자리는 왼쪽에서 두 번째, 앞에서부터 두 번째 자리였다. 천장 에어컨 바람이 오른쪽에서 솔솔 불어오고, 시험지를 먼저 받아볼 수 있는 자리.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내 주변은 모두 50대에서 6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와 할머니였다.


눈을 들어 교실을 한 바퀴 보니 10대로 보이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둘 뿐. 맨 뒷자리에는 70대가 넘어 보이는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도 도착해 짐을 풀고 있었다. 항상 학교 시험, 기껏해야 컴퓨터 자격증 시험밖에 본 적이 없던 16살의 나, 어리벙벙해진다.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은 느낌.

국어, 수학, 영어, 사회, 과학, 국사, 선택과목 두 가지. 시험이 진행되는 동안 오른쪽의 60대 아주머니는 옷을 하나하나 껴입었다. 쉬는 시간에 주변 사람들에게서 비닐봉지를 얻더니, 찢어서 간이 우비처럼 이어 붙여 온몸에 감았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봉지더미에 쌓인 눈사람 같은 모습이 돼갔다.

아주머니 바로 위에 에어컨이 있던 탓이었다. 자리를 옮길 수도 없고, 40명이 시험을 보는 공간이니 에어컨을 끌 수도 없고, 더 이상 입을 옷도 없으니 궁여지책이었을 거다. 그리 춥지도 않은 온도였는데도.

점심시간, 혼자서 도시락 통을 열고 먹으려 하는데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이 나를 불렀다. 동그랗게 둘러앉아 음식을 다 펴놓고 함께 나눠먹기 시작했다. 소고기김밥, 야채김밥, 각종 나물, 볶음밥, 불고기, 김치, 키위, 토마토, 바나나, 마무리로 식혜까지… 뷔페 아닌 뷔페였다. 내가 싸온 건 고작해야 죽 조금이어서 나눌 수도 없었는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함께 나눠먹었다.

어느새 마지막 교시 시험, 감독관으로 안경을 쓴 젊은 국어 선생님이 들어왔다. 시험이 한창 진행 중이던 때, 뒤쪽 아저씨의 말. “선생님, 답 좀 알려주시면 안됩니꺼.” 감독관 선생님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의 말은 시험시간 수다에 불을 붙였다. “시험 몇 번짼교?” “세번쨉니더” “이번에는 붙어야 되는데이” “수학이 와 이러케 어렵심꺼, 이번에도 내는 수학 때문에 떨어질 거 같은데 우얍니꺼.”

시험이 다 끝나고 밖으로 나가니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답을 맞춰보고, 남은 음식을 나눠먹고, 학원에서 나눠주는 간식을 먹으며 시험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들어갈 때보다 더 많은 학원 광고지를 손에 쥐면서 생각했다. 이 풍경은 잊혀지지 않겠구나.

그 해에 수능과 대학입시를 치르고 중학생에서 대학생으로 건너뛰었지만, 검정고시 시험장의 풍경은 계속 한켠에 남아있다. 젊은 사람에게는 전혀 춥지 않은 온도인데도 비닐봉지를 껴입고 시험을 보던 아주머니. 내 것 네 것 가리지 않고 음식을 나눠먹던 점심시간. 구수한 사투리로 시험 중간에 이야기하던 아저씨들. 50대에서 70대 사이에 둘러싸여 치른 시험. 경쟁이 아닌 시험은 이렇게도 치러질 수 있구나 싶었다.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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