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선물 받은 시계 이야기

2018-09-10 (월) 김성준 콜로라도대 정치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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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받은 시계 이야기

김성준 콜로라도대 정치학 박사과정

지금껏 손목시계를 비싸기만 한 사치품이라고 생각해왔다. 손목시계에 큰돈을 들이는 사람들을 이해해본 적도 없고 이해하려는 노력도 해본 일이 없다. 꼬마 시절에 부모님이 사준 돌핀 전자시계를 열심히 차고 다닌 적이 있지만, 성인이 되고 난 뒤에는 시계에 딱히 관심을 가져 본 적도 없다. 이런 내가 얼마 전에 아내에게서 시계를 선물로 받았다.

아내의 선물은 내 일상을 바꿨다. 요즘은 하루 종일 시계를 차고 다닌다. 손목시계는 라면을 끓일 때도, 오븐에다 냉동피자를 구울 때도, 학생들의 발언시간을 잴 때도 매우 유용하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유용성 때문만이 아니라, 조그만 바늘들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모습을 더 자주 보고 싶은 마음에 계속 시계를 괴롭히는 중이다.

나는 시계를 둘러싼 이야기들에도 매력을 느낀다. 시계의 역사를 인터넷에 검색하는 일이 하루 일과 중의 하나가 됐다. 고작 40mm 내외의 지름 안에서 사용자들에게 호소하기 위한 온갖 기술과 디자인, 마케팅 기법이 시험되었고 평가 받았다는 사실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아내가 사준 시계는 ‘시놀라’라는 미국 회사의 제품이다. 이 회사를 둘러싼 이야기도 흥미로운 점이 많다. 시놀라의 모든 시계에는 ‘디트로이트’에서 조립됐다는 문구가 크게 박혀있다. 한때 미국 제조업의 상징과도 같은 도시였으나, 미국 자동차 산업의 붕괴와 함께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그 디트로이트 말이다.

이 회사는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던 디트로이트의 해직 노동자들에게 시계 조립기술을 가르쳐서 제품을 만들고 있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시놀라 시계를 구입하는 일이 디트로이트를 살리는 일이자, 더 나아가서 미국 제조업의 부활을 돕는 일이라고도 광고한다.

물론 디트로이트를 부활시킨다는 이 용감한 스토리텔링은 시끄러운 논란을 함께 가지고 왔다. 가령 시놀라의 시계 제조공정의 실상을 보면 거의 모든 부품이 외국산이고, 디트로이트의 공장에서는 오직 조립만이 이뤄질 뿐이다. 이 회사가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간단한 조립공정의 의의를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소비자들의 애국심이나 동정심에 호소해서 비쌀 이유가 없는 단순한 시계들을 고가에 팔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시놀라가 엄청난 상업적 성공에 힘입어서 거의 500명에 달하는 정규직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도 최저임금을 훨씬 상회하는 좋은 조건으로 말이다. 또한 상당한 비중의 고용이 디트로이트에서 이뤄지고 있다.

나는 한국에도 시놀라 같은 회사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만약 한국에서 새로 출범한 어떤 회사가 쌍용 자동차의 해직노동자들을 고용해서 그들이 조립한 물건을 명품인양 고가에 팔기 시작했다면? 나는 없는 지갑을 털어서라도 그 제품을 샀을 것이다. 물론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대구의 섬유공장이나 부산의 신발공장, 경남의 조선소에서 해고된 사람들이었대도 내 생각은 다르지 않다.

시놀라 못지않은 부활의 신화를 쓸 수 있는 소재는 한국에도 많다. 왜 어떤 이야기는 내 손목 위에 올라와서 소소한 즐거움이 되었고, 왜 어떤 이야기는 끝까지 슬프게만 진행되는지 모르겠다. 500여 명을 고용하는 시놀라는 고작 2011년에 출범한 회사다. 쌍용 자동차의 대규모 파업과 정리해고 사태가 벌어진 지는 무려 9년이나 흘렀고, 해고 노동자의 전원복직을 위한 노사합의가 이뤄진지는 3년이 지났다. 복직을 원하는 167명 가운데 정말로 복직된 사람은 아직도 37명에 불과하다.

<김성준 콜로라도대 정치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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