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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히 흐르는 남강… 義妓<의기> 논개의 충절을 기리다

2018-08-31 (금) 글·사진(진주)=우현석 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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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진주, 임진왜란때 왜군 막아낸 진주성

▶ 세차례나 불에 타 중수된 촉석루, 논개가 적장 안고 몸던진 의암

남강은 의구하나, 시간을 헤쳐 온 진주는 역사의 여울목이다. 특히 진주성은 간단없는 외부의 침입을 막아낸 요충지인 동시에 임란 때는 두 번의 큰 전투를 치른 전략적 요지였다. 일제강점기, 부산에 ‘영남 제1의 도시’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 진주는 영남 최고의 거점이었다. 지금은 경남에서도 인구 40만의 중견 도시지만 전통과 풍류에서만큼은 영남 최고를 자부하는 진주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위해 염천을 헤매고 왔다.

진주성은 삼국시대에 거열성(居列城)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 고려 때 들어 촉석성(矗石城)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촉석성은 이름 그대로 돌이 우거져 있다는 뜻이다. 무생물인 돌이 어떻게 우거질 수 있겠느냐마는 깎아지른 바위 절벽이 강을 향해 버티고 서 있어 적군이 쉽게 들이칠 수 없는 요새라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하지만 촉석성이라는 이름은 조선 시대에 이르러 진주성으로 다시 한 번 바뀐다.


빈번해지는 왜구의 노략질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진주성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호남 진출을 노리는 왜적을 막는 저지선이 됐다. 장일영 문화관광해설사는 “무진주 무호남(無晉州 無湖南·진주가 무너지면 호남도 잃는다)이라는 결의로 진주성에는 영호남 병력 3,800명이 집결했다”며 “그들은 필사적으로 싸워 10배에 가까운 왜적을 물리쳤다”고 말했다. 이 승리로 조선은 왜군으로부터 곡창 호남을 지켜냈고 이순신의 수영(水營)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역사가 깃든 진주성은 원래 외성과 내성으로 구분돼 있었다. 원래 외성 전체 면적은 축구장 70개 규모에 달해 백성들이 거주할 정도로 컸으나 도시가 개발되면서 내성만 남아 축구장 25개 면적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게다가 성벽 아래에는 남강이 흐르고 있어 천혜의 해자 역할을 했다. 물을 건너지 않고는 성으로 진입할 수 없는 구조였다. 평지에 있지만 공략하려면 절벽을 기어올라야 하는 난공불락의 성이었던 셈이다.

왜정은 임란 때 뼈아픈 패배를 안겼던 진주성의 흔적을 지우는 데 골몰했다. 성터에 경찰서·소방서·학교·신사 등을 지었고 이름도 진주공원으로 고쳐 불렀다. 그래서 일제강점기나 직후에 태어난 노인들은 진주공원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편이다.

재미있는 것은 진주성은 해미나 낙안 같은 읍성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진주성은 이보다 훨씬 큰 행정단위로 낙동강 오른쪽 지역을 관할하는 경상우도 병마절제사를 겸한 목사가 다스리는 목이었다. 병마절제사는 관권과 군권을 함께 가지고 이곳에서 상주·선산·김천·고령·성주·합천·김해를 다스리는 동시에 남부지방의 야전사령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장 해설사는 “임란 때 진주성 전투는 승리했고 정유재란 때 진주성 전투는 패배했다”며 “하지만 왜군은 승리에도 막대한 타격을 입어 호남 진입에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말했다. 2차 진주성 전투 역시 호남을 지켜낸 전투였던 셈이다.

이렇듯 진주성을 중심으로 역사가 소용돌이쳤는데 촉석루라고 무사할 리가 없다. 촉석루는 정유재란·한국전쟁 등을 포함해 모두 세 차례나 불에 타 중수됐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기 전에는 모두 5채의 건물로 이뤄져 있었지만 6·25 때 발생한 화재로 국보 자리를 내려놓고 말았다.

땡볕을 피하려고 촉석루로 오르니 널찍한 누각 위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거나 낮잠을 자고 있었다. 대들보에는 하륜이 쓴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 고장 출신인 조선개국 공신 하륜이 촉석루를 복원한 경위를 기록한 것이다.

이런저런 설명을 듣는 와중에 시간은 흘렀건만 더위의 기세는 수그러들 줄 몰라 하는 수 없이 다시 땡볕 아래로 나서 누각 왼편의 의기사로 향했다. 의기사는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 때 진주성이 함락되자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끌어안고 물로 뛰어든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사당 앞에는 구한말 기생 산홍이 지은 시 한 구절이 적혀 있어 눈길을 끈다. 절세의 미인 산홍은 을사오적 중의 하나인 이지용이 자신의 첩이 될 것을 요구하자 “세상이 대감을 오적의 우두머리라고 합니다. 나는 비록 천한 창기이오나 자유로이 살아가는 사람이니 무슨 사유로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고 거절한 후 갖은 핍박을 받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글·사진(진주)=우현석 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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