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매화

2018-08-30 (목) 12:00:00 손주리(플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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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의 위험이 상존하는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고, 가뜩이나 산불이 빈발하는 요즘이라 만약의 경우 피신할 일이 생긴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챙길까 생각해 보았다. 몇 십 년이 흘러도 이민생활은 뜨내기 삶 같다는 생각을 하는 내 집에 값진 물건이 있을 리 없지만, 마루에 걸려 있는 두루마리 족자는 아마 챙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매경한고발청향(梅經寒苦發淸香)“이라는 시경의 글이 적혀 있는 이 족자는 친정아버지가 쓰신 서예작품이다. “매화는 혹한의 추위를 겪어야 맑은 향기를 발한다”는 뜻으로, “사람은 고난을 만나야 그 절개가 드러난다”는 댓귀절이 생략되어 있다. 골동품 감정 프로그램에 나간다고 해도 빛바랜 이 족자에 가격이 매겨질 리 없지만, 당연히 내게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 때문에 소중하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부터 기타를 비롯, 사진, 바둑 등 취미가 참 다양하셨는데, 시간표를 짜놓고 생활하시는 것처럼 정확했던 일과 중에서 몇 십 년을 한결같이 새벽에 하셨던 일이 한지를 두 겹으로 접어 끈까지 한지로 직접 만들어 엮은 독특한 노트에 고서를 필사하시던 일이었다. 아버지는 한때 부하직원의 모함으로 꽤 긴 법정다툼을 겪으셨는데, 다시 복귀하시기까지 집에 칩거하시면서 그 기간 동안은 밤낮으로 서예를 하시며 견디셨다. 6.25 때 납북되어 가다 총을 맞고도 탈출에 성공하셨던, 담대하셨던 아버지께도 체재 때문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한 그 일은 참으로 견디기 쉽지 않았던 쓰라린 경험이었던 것이, 글을 쓰고 계신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는 내게도 그대로 전해져 오곤 했었다. 이 족자도 아마 그 기간 중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초서로 써내려간 글들 중 하나일 것이다.


이른 봄날의 추위를 견디고 잎보다 꽃이 먼저 , 또 다른 나무보다 앞서, 눈 속에서도 꽃을 피워 설중매라고도 불리는 매화는, 그래서 시대를 앞서가야 하는 책임과 어떤 상황에서도 올곧음을 꿋꿋하게 지켜내야 하는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표상한다. 꽃말이 ‘기품, 품격’인 매화가 군자의 덕을 나타내는 사군자에도, 겨울을 견디는 세가지 벗- 세한삼우에도 소나무, 대나무와 함께 포함되는 이유도, 혹한을 견디고 하얀꽃을 피워내는 굳은 기개와 그 발하는 고귀한 향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의 매화는 그래서,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힘들고 외로운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향해 나가야 하리란 다짐을 하게 해주는 내 작은 힘이다.

<손주리(플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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