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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의 앵콜클래식] 엘렉트라(Elektra)

2018-08-24 (금)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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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의 앵콜클래식] 엘렉트라(Elektra)
음악에서 고전주의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이라는 천재를 낳으면서 낭만주의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는데 낭만주의란 음악에서의 詩的인(혹은 문학적, 철학적) 매혹이 더해졌다는 것을 뜻한다.

음악을 들으면서 울분하고 감격하며 슬퍼하는 따위의 격정이 더해지면서 음악은 더 이상 미사나 궁정 음악 등 지엽적인 예술의 모습이 아니라 교양과 사상으로 무장한, 유럽지성에 폭발적인 영향을 끼치는 하나의 폭탄으로 돌변하게 되는데 이때 등장한 위인이 바로 바그너란 인물이었다.

니체는 젊어서 바그너의 악극 ‘신들의 황혼’을 보면서 이제 신의 세계가 저물고 인간들의 세계가 동터옴을 직감했는데 그것은 인본주의가 휩쓸고 갈 거대한 폭풍에 대한 예감이기도 했다.


인간의 잠재의식 속에 내재한 모든 욕망들… 性的, 죽음, 권력의 의지의 분출은 정신분석학 속의 단순한 도표에 그친 것이 아니라 곧 몰아닥치게 되는 엄청난 혁명의 회오리와 전쟁의 피바람으로 그 사실성을 (역사 속에서) 입증하게 되는데 잠재의식의 과학적인 분석은 이미 써져있던 고대 희랍 정신(예술)의 대변이기도 했다.

인류는 이미 2천년, 3천년 전에 인간이 선의 가치, 도덕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스스로의 잠재적인 욕망을 위해 죽고 죽이는 무자비한 존재라는 것을 통찰하고 있었다. 예술가들은 이러한 인본주의의 개화와 더불어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으면서 예언자로서, 인문학을 주도할 인텔리적 맨 파워를 발휘하며 소수자를 위한 교양 예술로서의 그 황금기를 이루게 되는데 악극 ‘엘렉트라’(Elektra)는 그 황금기에 태어난 20세기의 대표적인 오페라 중의 하나였다.

오랫만에 다시 본 R. 쉬트라우스의 ‘엘렉트라’는 20여년 전, 오페라 공연으로 봤을 때 보다 그 감동이 더욱 색달랐는데 그것은 내 자신이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동에 옹색해지고 좀 더시니컬해졌다고나할까. 술에 술탄듯, 물에 물탄듯… 연극을 봐도 그렇고 책을 봐도 그렇고 음악도 옛날에 들었던 거 재탕이 대부분이다.

R. 쉬트라우스의 오페라에 무슨 색다른게 있을라구. 낭만주의란게 그렇지. 그저 벌겋게 색칠하고 과장하고 요란벅적하면 감동인줄 아는게 낭만주의 아닌가. 그런 나에게 ‘엘렉트라’는 여러모로 한 방 먹였다.

우선 이 세기의 명작은 명성만큼 그렇게 아름다운 작품은 아니었다. 그저 흑백사진 처럼 담백한 감동으로 다가올 뿐인데 뭐랄까 야성이 느껴진다고나할까. 원석 그대로의 극적인 박력이 꽤 신선한 체험으로 와 닿는, you튜브 감상을 한번 권해보고 싶은 작품이기도 했다.

희랍의 비극을 (극작가) 호프만스탈이 현대적으로 약간 물타기를 했는데 아버지를 빼앗긴 여자 아이들의 어머니에 대한 콤플렉스를 말하는 ‘엘렉트라’는 아버지였던 아르고스의 왕 아마겜논이 어머니 클리템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에 의해 목욕탕에서 도끼 살해를 당한 뒤 겪는 고통과 복수의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에우리피데스, 소포클레스 등이 남긴 비극으로도 유명하다.

R. 쉬트라우스는 1905년 발표된 ‘살로메 (Salome)’를 통해 바그너의 악극사상을 자신만의 언어로 체계화시켰다고 자부하기 시작했는데 차기작을 고심하던 쉬트라우스는1903년부터 베를린 클라이네스 극장에서 올려진 호프만스탈의 연극 ‘엘렉트라 (Elektra)’를 관람하고 이 뛰어난 연극이 자신이 추구하던 바를 궁극적으로 이루어 낼 것을 직감했다.


초연은 1909년 1월 ‘살로메’의 초연이 있던 드레스덴의 작센 궁정가극장에서 이루어졌는데 대본을 맡은 호프만스탈은 어둠과 빛이 대조된 가장 강렬한 오페라였다고 극찬했다.

‘ 엘렉트라’는 엄숙하고 냉혹할 만큼 감정이 배제되어 있고 극중 인물들은 대리석 조각처럼 차갑고 도덕 등 인간의 체온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소프클레스의 작품을 바탕에 두고 호프만스탈이 자신의 주장을 덧입혔는데 엘렉트라가 마지막 복수의 희열을 감추지 못하고 무한춤을 추다가 사망하는 것도 색다르다. 마치 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의 2중주같다고나할까, 음악은 처음부터 단조롭고 불협화음이 난무하며 무언가 망치로 두들겨 부수는 듯한 소음만이 가득하지만 劇과 음악의 강렬한 대비, 바그너가 창시한 악극이 의외로 한 여인의 도끼로부터 완성되게 된 것도 아이러니였다.

아버지의 죽음을 우연히 목격하게 된 엘렉트라는 아버지를 살해한 도끼를 남몰래 감추고 불안과 복수심으로 절규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는데, 시체가 되어 한줌의 흙으로 돌아온다던 남동생이 어느날 기적처럼 복수의 칼날을 품고 궁으로 잠입, 엘렉트라와 재회하면서 극은 극적인 반전으로 끝을 맺게 된다.

억눌렸던 복수심, 그리고 억제할 수 없는 희열이 교차된 엘렉트라는 광란의 춤을 추다 숨이 멎게되는데 여기서 신화는 인간의 복잡한 모습, 선을 행함에 있어서나 마찬가지로 악에서도 폭력이나 性, 질투, 복수, 살인, 원망, 분노… 이러한 저잣거리의 모든 더러움을 통해서도 인간이란 얼마나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존재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란 종교적이며 선한 존재라고요?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엘렉트라’의 이야기야말로 인간은 먼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극복해야하는, 아직도 진화하는 가면의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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