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창] 소공녀
2018-08-21 (화) 12:00:00
이수연(UC버클리 학생)
4차원적인 감성을 좋아하지 않는 터라 영화 소공녀에 대한 트레일러를 보았을 때 사실 큰 기대가 되지 않았다. 주인공 미소가 치솟는 물가 속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담배와 위스키를 포기할 수 없어 매달 월세를 내야 하는 집을 과감히 포기하고 정처없이 친구들 집에 머무르는 생활을 한다는 플롯이 터무니없는 공상이라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의외로 높은 평점에 조금 호기심이 생겨 한 손엔 맥주 그리고 다른 한 손엔 핸드폰을 보며 심드렁히 영화를 보기 시작했던 나는 어느새 미소에게 매료되어 그녀를 응원하고 있었다.
미소가 신세를 진 친구들은 그녀와 대학 시절 밴드부로 활동하며 함께 뜨거운 청춘을 보낸 이들이었다. 남들이 뭐라건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던 친구들은 예전의 뜨거움은 온데간데없고 현실에 치여 열정도 취향도 포기해버린 빛바랜 이들이었다. 그런 친구들의 집에 머무르는 동안 미소는 자신의 직업인 가사도우미의 특성을 살려 그들의 집을 깨끗하게 청소해주기도, 맛있는 음식을 요리해주기도 하며 덤덤히 위로해주고 달래준다. 친구들은 사회적으로 ‘그럭저럭 잘 사는 기준’에 걸맞은 사람들이지만 가진 것이라고는 담배와 위스키를 살 돈이 전부인 미소보다 초라했고 팍팍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의 기준에서 보잘것없는 미소는 오히려 그들보다 여유로웠으며 타인을 보듬어 줄 정도의 따듯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무모하고 염치없다 느꼈던 미소를 나는 부러움과 함께 동경하게 되었다.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판단을 우선으로 삼는 나는 선택을 해야 하는 많은 순간에 번번이 나의 취향과 감정을 억누르고 실속있는 판단을 내렸다. 사실 내가 그다지 원하지 않았어도, 다수가 세운 합리적인 기준에 부합했다면 그 방향을 택했다. 그것이 옳은 선택이며 나에게 더 이득이라 잔뜩 합리화를 했지만 택하지 않은 나의 취향과 감정에 대해 아쉬운 마음이 들곤 했다. 그때 조금 더 나의 마음을 따를 걸 하는 후회도 빈번했다. 매 선택에 내가 좋아하는 것보단 타인의 기준에 맞추기 일쑤였던 나는 때로는 하기 싫은 선택을 하며 날카로워지기도, 무기력해지기도 했다. 뜨거웠지만 이제는 식어버린 미소의 친구들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이 될까 봐 겁이 났다. 안정성을 추구하는 나는 미소와 같은 삶을 완벽히 살아낼 수 없을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가끔은 미소를 닮아가고, 또 다른 미소를 응원하고 싶다.
<이수연(UC버클리 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