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공감에 반대한다고?

2018-08-20 (월) 김장원 공학박사
작게 크게
공감에 반대한다고?

김장원 공학박사

최근 ‘Against Empathy’라는 책에 대해서 지인들과 생각을 나누었다. 보통은 Empathy(감정이입)라 하면 긍정적인 감정, 착한 사람, 더 좋은 세상 등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 좋은 감정에 반대를 한다니, 대체 무슨 말인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최소한 책의 제목은 참 잘 지었다. 이 점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조금은 자극적이면서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두 단어. 그 덕분일까? 재작년에 출판된 이 책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나는 사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 대신 작가의 강연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이 책을 요약해서 발표하는 1시간 정도의 긴 강연이었다.

강연의 요지는 감정이입 자체에 대한 반대라기보다는 감정이입으로 인한 행동이 지나치게 미화되는 현상과 착각에 대한 반대였다. 그리고 감정이입보다는 compassion(연민)이 더 좋은 감정이라는 것이다. 상대방의 감정을 함께 느끼는 듯한 기분을 empathy, 그 감정을 인지하지만 내가 느끼지는 않으면서 하는 이성적 위로를 compassion으로 구분했다.

나는 compassion이 empathy 보다 나 자신과 상대방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감정이 흔들리면, 힘들어하는 상대방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안 될 수 있다. 어쩌면 나 자신의 감정에 매몰되어 위로는 뒷전이 될지도 모른다. 또한, 감정 때문에 행동을 섣불리 할 수도 있다.

공감이라는 ‘착한’ 이유 때문에 벌어진 행위는 그 결과와 상관없이 쉽게 도덕적으로 간주되곤 한다. 그래서 행위의 결과를 이성적으로 따져볼 기회마저 놓치기도 한다. 나와 지인들은 작가가 지적한 이런 문제점에 충분히 공감했다.

하지만 empathy는 아직도 내가 정말 좋아하는 감정이다. 어쩌면 동경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empathy는 사람이 가진 수많은 감정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훌륭하다.

empathy가 주는 위로는 compassion보다 더 강력하다. 탁월한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음악, 문학, 미술작품, 영화 등을 창조하여 시-공을 초월하는 공감을 이끌어낸다. 예술을 통해 수많은 사람이 비슷한 감정을 함께 공유하고 나눌 수 있다는 건 정말 놀랍다.

때로는 문제 해결을 위한 조언을 듣는 것보다 나보다 더 슬퍼하는 친구가 있다는 그 자체로 상처가 치유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상대방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게 큰 문제는 아니다. 어차피 본인의 문제는 본인이 알아서 해결해야 하므로.


우리는 공감이 점점 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나 스스로도 예전보다 덜 공감하며 산다고 느낀다. 오늘 해야 하는 회사일과 가족을 위해 챙겨야 하는 일들이 더 급하다. 거기에 먼저 신경을 쓰다 보면 타인의 감정은 내 관심의 저 뒤편으로 밀려난다.

미친 일이 자꾸 벌어지는 요즘, 굳이 타인에게 공감하며 살기 좀 지치기도 한다. 타인에 대한 관심과 공감은 나름 조절하면서 적당히 해야 현실적으로 잘 사는 걸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의 SNS에서 많이 하는 간단하고 빠른 표현에 난 더 익숙하다.

차라리, 귀찮고 번거롭고 신경이 쓰이더라도, 내 공감능력이 더 커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김장원 공학박사>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