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화이팅’의 진화

2018-08-13 (월)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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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팅’의 진화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5학년 7반이었던 우리는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 화이팅!”을 외쳐대고 있었다. 태극전사 화이팅, 붉은악마 화이팅, 안정환 화이팅, 이운재 파이팅.

‘화이팅’은 말 그대로 마법 같았다. 펄펄 끓는 승리를 위한 열망을 그대로 표현해 주었으니까. 마흔 명의 초등학생이 토해내는 ‘화이팅’은 닭장 밖을 향해 빽빽 소리 지르는 병아리 마흔 마리처럼 교실을 사정없이 울려댔다. 선생님도 수업을 포기하실 만큼.

초등학생 마흔 명에게 항복한 선생님은 질문을 하나 꺼내셨다. “화이팅을 ‘fighting’이라고 쓰지? 무슨 뜻이게?” “싸워라!” 라고 영민한 친구가 대답했다.


선생님은 덧붙이셨다. 미국인한테 ‘화이팅’이라고 하면 힘내서 이기라는 말이 아니라 ‘싸움’ 이라는 말이 돼 버린다고. 화이팅은 콩글리시라고. 힘내라는 뜻을 전하고 싶으면 ‘cheer up’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Cheer up, 치어 업. 치어 업? 12년 짧은 인생에 처음 들어보는 낯선 음파가 교실에 울렸다.

그 이후로 ‘화이팅’ 은 낯설어졌다. 미국에 사는 노란 머리 외국인이 시험 삼아 만들어본 한복을 껴입고 있는 느낌. 분명히 글자도 소리도 단어도 영어인데, 왜 한국에서는 힘내라는 말로 쓰이고 미국에서는 싸운다는 말로 쓰이는 건지. 외양은 영어지만 뜻은 한국어. 둘 사이의 괴리.

16년 후, ‘화이팅’을 다시 발견하게 된 건 프로듀스 48 유튜브 영상에서였다. 프로듀스 48은 92명의 한국 및 일본 연예인 지망생이 경쟁하는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이다. 전 세계 각양각색의 언어로 댓글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댓글에서 내가 본 건 2002년 이후 낯설어진 단어, fighting이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자신이 응원하는 연습생의 이름 뒤에 fighting! 혹은 hwaiting! 을 붙여서 응원하고 있었다. fighting 이라니, 그건 콩글리쉬 아니었던가! 한 술 더 떠서 hwaiting 이라니 도대체 이 무슨 끔찍한 혼종인가! 분명히 영어로 이렇게 쓰면 안 되는데 왜 다들 이렇게 쓰는 걸까!

Fighting은 영어 단어다. 그러나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힘내라는 뜻을 가진 콩글리시가 되었다. 이후 K-팝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이 콩글리시 단어가 한국 바깥으로 퍼져나갔다.

세계의 K-팝 팬들은 예능 및 콘서트에서 한국인들이 열광하며 외쳐대는 “화이팅!” 이란 말의 뜻이 궁금했을 거고, 그걸 구글에 물어봤을 거고, 다른 사람들이 대답해주었을 거다. 그렇게 지구 곳곳의 사람들이 fighting을 외치게 되었을 거다. 2002년의 우리가 “태극전사 화이팅”을 외쳤던 것처럼, 2018년엔 전 세계 사람들이 “권은비 화이팅” “강혜원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영어는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영어가 제2언어인 사람들끼리 영어로 소통하는 경우가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끼리 소통하는 경우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의 영어 사용자들이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낸다. 다수의 사람들이 새로운 단어에 뜻을 부여하여 사용하게 되면 그 단어는 생명을 얻는다.

수많은 콩글리시 단어들도 그렇다. ‘화이팅’은 물론이고 ‘물은 셀프’도 그렇다. 콩글리시는 부끄러워해야 할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언어 현상일 뿐이다. 콩글리시 단어 중에서도 ‘화이팅’은 한류와 K-팝의 흐름을 타고 세계인이 쓸 정도로 생명을 얻었다. 언젠가는 ‘물은 셀프’도 세계인이 쓰고 있을지도.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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