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비상연락망은 너다!” 친구가 말했다. 병원에 검진을 받으러 갔다 비상연락처를 적는 란에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었노라 했다.

친구는 나처럼 20대 후반에 갑자기 미국에 왔다. 나는 가족이 모두 이 곳에 있었지만 그녀는 연고도 없는 이 나라에 혈혈단신으로 와있다. 회사 일 때문이긴 했지만 쉽지 않은 결정이었으리라. 간혹 비상연락처를 적어내라는 요청을 받으면 자신은 당장 생각나는 사람이 나뿐이라고 했다.

지난달 미국에서 평생의 짝을 만나 결혼한 친구에게도 “네 진짜 친정은 한국에 있지만 미국 친정은 나” 라고 생각하고 언제든 무슨 일이 있으면 내게 오라고 일러두었다.누군가의 비상연락처와 친정이 되다니 그녀들의 인생의 일부를 책임지는 느낌이 든다.

내 비상연락처는 누구로 적었는지 생각해보았다. 주로 여동생이다. 영어를 잘 못하는 부모님보다는 미국에서 나보다 오래 산 동생이 내 응급상황 뒤처리를 더 잘해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동안 겪었던 몇 번의 접촉사고나 기타 복잡한 행정업무 시 항상 동생이 도움을 주었다. 내 비상연락망인 가족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얼마 전 한 한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어느 유학생이 미국에서 간단한 수술을 받는데 당일 퇴원을 해도 집에서 돌봐 줄 사람이 없어 입원을 결심했다며 병원비가 대략 얼마가 나오겠느냐는 문의 글이 올라왔다. 몸이 아픈 것도 서러운데 자신을 돌봐 줄 사람이 마땅치 않아 먼 타지에서 병실에 홀로 누워 입에 맞지 않는 병원 밥을 먹고 있을 그녀를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얼굴도 모르는 이의 사연이었지만 마음이 아팠다. 타지에서 혼자 몸이 아프면 정말 외롭고 서럽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럴 일은 없으면 좋겠지만 혹시라도 나 또는 내 친구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전화가 갈 우리의 비상연락망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들이 비상시 만사 제쳐두고 달려와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는 사실이 참 고맙고 눈물 난다.

서로서로 돕고 사는 미덕은 점차 희미해지고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팽배해지고 있다. 개인의 가치관과 개성을 존중하고 장려하는 미국에서 이런 추세는 더 두드러진다. 남의 일에 관심을 보이면 주제넘게 참견하지 말라고 핀잔을 듣기도 한다. 그래서 나의 행동을 더욱 조심할 때도 있다.

연고 없이 미국에 사는 이들로부터 이따금 미국생활이 외롭고 힘들다는 말을 듣는다. 무한정 관심과 애정을 주고받아도 괜찮을 가족이 없는 땅에서 정 붙일 곳을 찾지 못한 이들의 하소연이다.

자의든 타의든 타지에 뿌리내려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는 이민자의 삶이 다 외롭고 힘든 길이겠지만 함께 해주는 이웃과 친구가 있다면 조금은 따뜻한 여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오지랖 넓다는 소리 좀 들으면 어떤가. 누군가의 비상연락망에 내 연락처를 많이 내어줄 수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다.

<이보람 adCREASIANs 어카운트 매니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