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치매에 걸리더라도

2018-07-20 (금) 12:00:00 송일란(교회 사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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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신부님께서 해 주신 이야기다. 신학교에 다니실 때인데, 은퇴 사제 한 분이 치매에 걸리셨단다. 그런데 이분이 신학생들 공부하는 교실의 뒷문을 열고는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해맑게 웃으시곤 하셨는데, 그 표정이 얼마나 해맑고 천진난만한지 보는 사람들을 저절로 행복하게 만드셨단다.

또 다른 이야기는 치매 요양원에 계신 분인데, 이분의 치매 증세는 계속 감사하다고 말하는 거였단다. 의사에게도, 간호사에게도, 방문하는 사람들 모두에게도 볼 때마다 감사하다고 하는데, 반복되는 감사하다는 말에 얼마나 따뜻함과 정성이 묻어나는지 그분을 보는 모든 사람이 위로를 받곤 했단다. 치매에 걸리더라도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다니 이런 복이 있을까.

데뷔 30주년 기념 공연을 준비 중인 연예인이 있는데, 후배들이 그 공연에 자진해서 자리를 빛내주는 것을 봤다. 그 후배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후배들을 잘 챙겨주는 선배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좋을 때보다 안 좋을 때 더 찾아와 주던 선배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경조사를 잘 챙기되, 초상난 집을 살뜰하게 챙긴다.


이런 사람들은 또 인생 풀리지 않아 돈벌이도 없거나, 풍랑에 휘말려 배는 격파되고 나뭇조각 하나에 매달려 있는 것 같거나, 아니 그 나뭇조각조차 놔 버리고 싶을 정도의 고통 중인 사람을 찾아와 용돈도 주고, 위로도 해 주고, 일자리도 봐 주고, 같이 그 시간을 보내준다. 또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말이 참 따뜻하다. 그리고 긍정적인 위로의 표현을 잘한다.

미국 이민 오기 전, 가정이 풍비박산 되어 비행기 푯값도 없어 초주검이 되어 있을 때, 친한 친구가 밤길에 찾아와 해맑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손에 돈을 쥐어 주고는 돌아서 갔다. 얼떨결에 받아든 손을 펴보니 33만원이 허술하게 둘둘 말려 있었다. 한눈에 봐도 있는 돈 탈탈 털어 갖고 온 돈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렇게 해맑은 표정을 하고 주고 가다니.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위로가 되고,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해줘야지 하는 착한 생각이 든다.

치매에 걸리더라도 말 한마디, 표정 하나로 옆 사람을 위로하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데, 아직 멀쩡한 우리는 더 많이 행복 바이러스 전하며 살면 좋겠다.

<송일란(교회 사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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