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창] 나의 VIP
2018-07-07 (토) 12:00:00
양주옥(피아니스트)
며칠 전 우리 부부는 결혼 31주년을 맞았다. 처음 몇 년은 무슨 대단한 날인 것처럼 챙기려 들고 뭔가 특별한 이벤트를 기대했었는데 어느덧 삼십 여년을 살다 보니 그저 그날이 그날일 뿐 특별한 생각이 안 들었다. 그래도 왠지 그냥 넘어가기 섭섭해서 가까운 곳에 등산이라도 함께 가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며칠 전부터 어디를 가야 하나 인터넷으로 검색을 했지만 워낙 다녀보지 않은 나로서는 사진이 근사해 보이는 곳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야무지게 간식과 물까지 챙겨서 길을 떠났는데 우릴 인도하는 네비게이션은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곳으로 우릴 안내하고는 도착지로 알려줬다. 썩 내키진 않았지만 이왕 맘먹고 왔으니 그래도 가 보기로 하고 길을 들어섰다. 그늘 한 자락 없는 뙤약볕에 먼지만 날리는 좁은 길을 가자니 땀도 나고 힘이 들어 괜히 오자고 했나 은근 후회도 되었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길을 둘이 걷는데 평소 무뚝뚝한 남편이 손을 내밀어 잡아주었다. 신혼 때 고왔던 남편의 손이 거칠게 느껴졌다. 작곡을 전공한 남편은 곡을 쓰고 악기를 다루며 관현악단과 교회에서 지휘만 하던 사람이었는데 미국에 와서 온갖 궂은 일은 다하고 가족을 위해 애쓰다 보니 반백의 머리도 얼마 남지 않은, 병을 달고 사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젊었을 땐 남편보다 아이들에게 더 정성을 쏟았던 것 같고 그런 나를 남편은 늘 이해해 줄 거라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렇게 내 전부를 주었던 아이들은 모두 떠나고 지금은 남편만 내 옆에 있었다. 거친 손이 그가 살아온 고단함을 말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고 그동안 남편에게 소홀했음이 새삼 미안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남편과 함께 걷다 보니 넓은 베이 지역이 눈앞에 펼쳐졌다. 우리 인생길도 그렇겠지. 좋아 보여서 선택한 길이 때론 고생길이기도 하고, 예기치 못한 어려움을 만나기도 하지만 부부가 함께 헤쳐 나가다 보면 잘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또 지금은 고난이지만 먼훗날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보면 이 또한 좋은 추억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순간 지난 31년이 멋진 추억으로 그려졌다. 비록 등산은 힘들었지만 잊고 있었던 남편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 산행이 되어 나름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다. 나의 영원한 VIP 당신을 사랑합니다. 앞으로도 더 건강하게 오래도록 함께하면서 멋진 인생의 동반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양주옥(피아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