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수상한 페미니스트 투사들

2018-07-02 (월) 김성준 콜로라도대 정치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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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페미니스트 투사들

김성준 콜로라도대 정치학 박사과정

페미니즘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어서일까? 평소 여성 인권에 별로 관심이 없던 분들이 갑자기 페미니스트 투사로 거듭나는 경우가 자주 목격되고 있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많은 분들이 여성 인권의 증진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면 정말로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새로 등장한 페미니스트 투사들의 면면은 다소 수상해 보인다.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보수 성향의 기독교인들은 여성 인권에 그리 친화적인 집단이 아니었다. 이들은 여성의 목사 안수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낙태죄 폐지나 차별금지법 제정 같은 페미니즘의 주요 현안에 대해서도 매번 어깃장을 놓아 왔다. 교회 지도자들의 성폭행 사건에 대해서도 가해자를 두둔하는 식의 의아한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체류하고 있는 예멘 출신 난민들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갑자기 이들은 여성의 안전을 누구보다도 걱정하는 사람들로 변신했다. ‘난민 반대’를 외치는 보수 기독교인들은 ‘강간범’이나 마찬가지인 무슬림 남성들의 위협으로부터 ‘우리 여성들’을 지켜야 한다고 울부짖는다. 제대로 된 근거는 제시된 적이 없다.


이들은 하나같이 유럽과 미국의 극우 세력들이 조작한 선정적인 가짜뉴스를 가지고 온다. 이들의 맹활약 덕분에 난민 수용에 반대한다는 청와대 청원에 서명한 사람들의 숫자는 40만을 넘었다.

미주 한인들은 이 사태를 보고 기시감을 느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어떤 관점에서 보아도 여성 인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일단 본인부터가 여러 건의 성추행과 아내 폭행 의혹을 받고 있다.

트럼프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의 보장 수준을 심각하게 후퇴시키기도 했다. 전미가족계획연맹(Planned Parenthood Federation of America)에 대한 연방 예산 지원을 삭감하면서, 테네시 같은 보수적인 주의 정부들이 사실상 낙태를 금지할 수 있도록 도왔기 때문이다.

이런 트럼프도 난민과 미등록 이민자들 앞에서는 강경한 페미니스트 투사로 변신한다. 트럼프는 이민자들이 여성의 안전을 위협하는 ‘강간범들’이라고 별 다른 근거없이 반복적으로 주장해왔다.

하지만 통계는 난민과 이민자에 대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뉴 아메리칸 이코노미 리서치 펀드(A New American Economy Research Fund)에서 내놓은 자료를 보면 인구 규모 대비 가장 많이 난민을 수용한 상위 10개 미국 도시들 중에 무려 9개 도시에서 범죄율이 크게 감소했다. 요즘 난민 문제로 시끄러운 독일의 범죄 통계도 마찬가지다. 지난 5년간 난민을 포함한 이민자 유입은 극적으로 증가했지만, 강간을 포함한 각종 여성 대상 범죄건수는 오히려 감소했다.

난민 반대를 내세우며 여성 인권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약간이라도 진정성이 있다면, 누구보다도 취약한 처지에 있는 난민 여성들을 강간, 감금, 인신매매 등의 위험으로부터 어떻게 보호할지에 대한 대책부터 세워야 할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그 대책이 ‘난민 반대’일 수는 없다. 난민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은 그저 여성 인권을 위한다는 핑계로 이방인에 대한 공포를 퍼뜨리고 있을 뿐이다.

과연 제대로 된 근거도 없이 갈 곳 없는 이방인을 배제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성 인권에 친화적일 리가 있을까?

<김성준 콜로라도대 정치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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