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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의 앵콜클래식] 날개

2018-06-22 (금)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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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의 앵콜클래식] 날개
젊은 날의 비극, 아니 어쩌면 스스로의 날개를 돋게 하기 위해 누구나 한번쯤은 겪게 되는 젊은 날의 방황. 그 불행했던 한 시기를 말함에 있어서 빚진 것이 있다면 아마도 이상의 ‘날개’ , 그리고 카프카의 ‘변신’ 과 같은 불우한 작가들의 소설일 것이다. 물론 이들의 소설이 누구에게나 어떤 (삶의) 모범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차치하고) 어쩌면 절규라고도 부를 수 있는 그 삶의 비극을 문학을 통해 날아올랐던 그들의 독특한 예술적 방황은 마치 불행을 하나의 낭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했던, 운명적 선물이었는지도 몰랐다.

나의 어린 시절은 차라리 어두운 단조의 칸타빌레같은 것이었다. 사춘기, 아직 코밑 솜털도 채 돋아나기 전에 찾아 온 불행은 나를 10여개월 동안 침대에 누워지내게 했다. 그 때 아득한 어둠 속에서 보였던 것은 삶이란 결코 절로 굴러가는 장미빛 여행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또 애쓴다고해서 스스로 행복을 창조해 나갈 수 있을 만큼 인생이란 노력의 쓴잔이 맺어주는 어떤 열매같는 것도 아니라는 점도 알았다.

이런 경우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이 되거나 허무주의를 체험하게 되곤하지만 이때 예술에 심취하게 되는 유형이 되기도 한다. 음악을 듣는다거나 책을 읽는다거나하는 습관은 그때 길러지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해서 예술가를 동경하거나 또 그들과 같은 길을 가겠다고 스스로 다짐하게 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인생의 저울추 그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자생적으로 파생된, 어떤 운명적인 노력같은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한 사람의 폐족으로서, 나라는 인간이 이 지구상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지를 못하리는 생각이 자신을 우울하게 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누구처럼 지식을 습득해보겠다거나 문인 등의 꼬리표 따위를 달고서 삶의 불행을 덮어 보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오히려 내면에 실존도 없는 놈들이 문학이니 뭐니 폼잡고 있는 모습들을 보면 인간의 저변에 깔려 있는 허영이랄까 문학이란 이름의 그 존재의 가벼움에 냉소가 절로 솟곤 했다.

(우리가) 과연 인생이 뭔지, 문학이 뭔지 알고나 있는 것일까. 그저 폼이나 잡고 싶은 거겠지. 동시대의 작품들을 기피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겠지만 이상(李箱)의 경우만은 좀 독특했다. 물론 그의 오감도 같은 전위예술의 한 형태를 충분히 이해하거나 그의 천재적인 기행이 특별히 다가 온 것은 아니었지만 소설 ‘날개’ 가 주는 그런 패배주의가 맘에 들었다. 독특하거나 독창적인 문체가 좋았다기 보다는 그 솔직함이 맘에 들었다고나할까. 어차피 천재란 자기와의 싸움인 것이지 누구의 눈치 따위나 보고 세상과 씨름하려는 놈들은 이미 자신의 순수를 엿바꿔먹은 놈들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었다. 음악을 듣는다고해서 또 듣지 않는 다고 해서 하루 종일 방구석에 처박혀 소설을 읽거나 피아노 건반을 울린다고해서 또 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에 관심가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온 종일 책을 읽고 또 온종일 음악을 듣고 자기 세계에 젖어 산다는 것은 그저 방안에서 기어나온 빈대에 물려 종일 상채기나 긁는 날개 속의 주인공, 그 유사한 아픔이자 그윽한 쾌락에 불과한 것인지도 몰랐다. 당신은 천재가 되고 싶었던 거요? 그렇다고도 또 아니라고도 할 수 없었다. 사실 천재가 되고 안 되고는 스스로 결정할 문제도 아니요 또 그 자체가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천재적인 그 어떤 것이 한 많은 세상을 원수갚을 수 있는 유일한 위로가 될 수 있었던 것 만은 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미친 듯이 음악을 듣거나 세상과 격리되어 스스로에게 몰두되어 살아야했던 변명의 이유를 댈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상은 (날개에서) 아스피린과 아달린(수면제)을 먹고 휘청거리며 거리를 나선다. 때는 오후, 그는 어느덧 미스꼬시 옥상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흐느적거리는 금붕어(의 지느러미)를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너는 인생에 무슨 욕심이 있냐고. 있다고도 아니다고도 할 수 없었다. 어디로 가야하나. 피곤한 삶이 지느러미처럼 흐느적 거리는 회탁의 거리. 이 때 그는 아스피린과 아달린, 그 몽롱한 혼돈 속에서 겨드랑이가 가렵다.

그것은 그의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 그래 날자 다시한번 날아보자꾸나 날개를 외치지만 삶이란 그렇게 끓어질 듯 말듯, 사라질 듯 말듯 그 생사를 넘나드는 간악하면서도 또 영혼의 멱살을 쥐어 흔들며 혼절을 반복케하는 하나의 선율, 한 순간의 꿈인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우리 아니, 나라는 인간은 이 세상 그 누구에게 알아주길 바랬던 것일까. 그저 스스로에게 천재이길 바랬던 날개 속의 인물, 누구에게나 있고 또 누구에게도 없는 그런 한결같지만 또 별다름없는 보통인간, 그러나 본질적으로 타고난, 어쩌면 허영의 날개를 퍼덕이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그저 한 사람의 낭만파에 불과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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