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중생활

2018-06-18 (월) 이보람 adCREASIANs 어카운트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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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생활

이보람 adCREASIANs 어카운트 매니저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이었다. 일요일 밤 비행기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기분 탓인지 기내는 내일이면 학교와 일터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피로와 걱정이 켜켜이 쌓여 있는 것 같았다.

나 또한 월요일에 처리해야 할 업무들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빨리 비행기가 이륙하길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잠시 후 한 승무원이 주목해달라며 안내방송을 한다. 안전교육 시간이다. 승무원이 능숙하게 시범을 보인다. 그가 중간 중간 농담을 섞어 분위기를 띄운다.


피곤함이 묻어나던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번졌다. 항상 지루하기만 했던 안전교육에 유머가 더해지니 안전수칙이 더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어느새 그가 시키는 대로 팔 동작을 따라 하고 있었다.

교육 말미에 그 승무원은 자신이 코미디언이라고 밝혔다. 썩 웃기지 못해 승무원 생활을 그만두지 못하고 투 잡을 뛴다고 말했다. 그 말에 또 사람들이 까르르 웃었다.

그 말은 농담이고 자신이 10년 넘게 몸담고 있는 이 항공사를 자신은 너무 좋아하며 즐기면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두 가지 일을 병행할 수 있어 행복하다며 그는 밝게 웃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다음날 LA의 작은 극장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를 한다며 보러 오라고 했다. 옆에 선 승무원 동료들이 손가락 휘슬을 불고 손뼉 쳤다. 승객들도 그에게 축하와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자신의 일터에서 본인의 또 다른 직업을 당당하게 밝히고 그 일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드러내는 그가 부러웠다.

내가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했을 때는 직원이 투 잡을 뛴다고 하면 색안경부터 끼고 보았다. 본업에 충실하지 못하고 한눈을 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 본업 외의 일은 잘 밝히지 않는다.

그런데 비행기에서 만난 그는 이중생활에 너무 당당했고 동료 승무원들과 기내의 승객들은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심으로 응원했다.


나도 직장생활을 하며 틈틈이 글을 쓴다. 가끔은 하나에만 더 집중하면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 이중생활을 통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삶의 활력을 얻고 반대로 일하며 영감을 얻기도 한다.

나도 그 승무원처럼 내가 좋아하고 즐기는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LA까지 그와 비행하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그의 이중생활을 응원했다. 언젠가 그가 정말 배꼽 빠지게 웃기는 코미디언이 된다면 그는 승무원 생활을 접게 될까?

생각만 해도 아쉽다. 다음번 이 항공사를 이용할 때에도 그 재밌는 승무원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이보람 adCREASIANs 어카운트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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