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이 세상 떠날 때는

2018-06-15 (금) 12:06:17 송일란(교회 사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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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요양원에 간 적이 있다. 볼일을 마치고 나오다 로비에서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로비 이곳저곳에 휠체어 타고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계셨는데 고개를 옆으로 혹은 앞으로 떨어뜨린 채 미동도 없는 모습이 마치 영화 속 정지화면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신이 잠시 멍했다가 정지화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니 마음에 휭 바람이 몰아쳐 지나갔다.

처음엔 눈으로 분명히 본 장면이건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는 우리 모두 그런 모습이 되어야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는 거구나 싶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자만심, 청춘의 에너지 다 내려놓고,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겸손하게 타인의 도움을 기다리고, 내 의견 내세울 기력도 없어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바로 그 모습이 이 세상 떠나 저 세상으로 가는 모습이 아닐까.

아버지는 올해 한국 나이로 구순이시다. 젊으셨을 적 아버지는 기골이 크셔서 이태원까지 가서 외국인 옷을 사서 입으셨을 정도였다. 어떤 때는 양말조차도 엄마가 손뜨개로 만들어 주시기도 했다. 그러셨던 아버지가 예전 옷이 다 헐렁해져서 어깨는 팔까지 내려오고 팔목은 접고 또 접어 입으신다. 새 옷도 마다하신다. 있는 옷 다 입어도 죽을 때까지 못 입는다고 손사래 치신다.


시집가는 전날까지 품에 안고 예쁘다 예쁘다 해주셨던 아버지 품은 너무나 왜소해져서 내 한 팔에 쏙 들어오신다. 책을 보시다가도 좋은 구절, 어려운 단어가 나오면 이리 와보라며 설명해 주시는 것을 좋아하던 아버지는 세상살이 지혜도 많이 가르쳐 주셨건만, 이제는 자식들이 이렇게 하셔야 돼요, 저렇게 하셔야 돼요 잔소리 비슷하게 말을 드려도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하신다.

내 한 팔에 안기시는 아버지를 한국에 두고 돌아올 때면 눈물바람을 한다. 그렇게 노쇠해져가는 아버지를 속절없이 그것도 멀리 미국 땅에서 바라보고만 있는 무력한 내가 속상했다. 그러나 그렇게 작디작은 이의 모습이 되어야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면, 아버지는 지금 그 과정을 가고 계신가보다. 그 과정이 어찌 힘들지 않으실까. 힘드신 과정을 고통분담을 하면 좋으련만 함께 해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뿐이다. 아버지, 사랑해요.

<송일란(교회 사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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