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보따리 하나 들고 ‘36년간 피신’… 해월의 삶 되짚다

2018-06-08 (금) 글·사진(영월·원주·여주)=우영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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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시형 순교 120주년… 영월·원주·여주 동학기행

▶ 강원 영월···1871년‘이필제의 난’피해 은신, 동굴서 머물며‘대인접물’설법

보따리 하나 들고 ‘36년간 피신’… 해월의 삶 되짚다

영월 직동의 풍경. 험준한 산세와 대비되는 평화로운 풍경을 자랑한다.

보따리 하나 들고 ‘36년간 피신’… 해월의 삶 되짚다

최시형이 체포된 가옥.


보따리 하나 들고 ‘36년간 피신’… 해월의 삶 되짚다

여주 천덕산의 해월 최시형 묘소.


1863년 36세의 최시형은 수운 최제우로부터 해월이라는 도호(道號)를 받고 동학의 2대 교주가 된다. ‘최보따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전국 팔도를 보따리 하나와 함께 돌며 구한말 피폐해진 민초들의 삶을 보듬었던 그였다.

동학은 최시형의 지도 아래 교세를 확장해 1890년대에는 경상·전라·충청 삼남지방을 거의 포괄할 정도로 성장했으나 교조신원운동에 이어 1894년 동학혁명이 전국에서 발발하고 일본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이후 최시형을 향한 정부의 칼날은 더욱 날카로워져 그는 괴나리봇짐을 메고 36년간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그 흔적이 오늘날까지 남은 장소만 200여곳에 이른다. 최시형의 순도(순교) 120주년을 맞아 교단과 학계 인사들로 꾸려진 동학 유적지 탐방단과 함께 그의 자취를 둘러보았다. 여름의 길목에 들어 햇볕이 따가워진 6월 초 찾아간 동학 유적지 영월·원주·여주에는 당시 험난했던 민초들과 최시형의 흔적들이 곳곳에 스며 있었다.


우선 강원 영월군 중동면 직동2리 돌배마을 최시형의 피신처다. 1871년 겨울 ‘이필제의 난’에 따른 화를 피하려고 최시형이 향한 곳이 바로 이곳 영월 직동이다. 그곳에 우뚝이 서 있는 유적비가 굴곡 많았던 그의 삶을 절절히 말해주는 듯했다.

직동에서 호랑이가 그의 신변을 지켜줬다는 전설이 남아 ‘호굴’로 명명된 동굴에서 머물며 은신생활을 하던 최시형은 그곳을 지나가던 나무꾼 박용걸의 도움으로 동굴에서 나와 1년여간 그의 집에서 머물게 된다. 오늘날에도 전해져 내려오는 ‘인시천(人是天)하니 사인여천(事人如天)하라(사람이 곧 하늘이니 사람을 하늘처럼 대하라)’는 대인접물(待人接物) 설법을 1872년 1월 이곳에서 했다. 직동(稷洞)은 피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윤경섭(54) 이장은 “직동의 직이 한자로 곡식 피를 뜻하지만 동학과 빨치산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린 골짜기라 ‘핏골’로 부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고을 입구에는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을 위로하기 위한 살풀이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해발 550m. 가파른 경사 때문에 오늘날에도 농사를 지을 때 기계 대신 소를 사용해야 하는 이곳에서 최시형은 평등한 세상을 꿈꿨다. 그가 살아 오늘날 세상을 본다면 만족할 수 있을까. 36가구, 70여명이 사는 평화로운 마을은 험준한 산세와 대비됐다. 영월시외버스정류장에서 직동리행 버스를 이용하거나 31번국도를 타고 이동하던 도중 시루교에서 좌회전을 하면 찾아갈 수 있다.

다음으로 발길이 닿은 동학 유적지는 강원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 송골로도 불리는 이곳은 최시형이 관헌에게 체포된 곳이다. 송골 인근의 추모비에 쓰인 ‘모든 이웃의 벗 최보따리 선생을 기리며’라는 글귀가 한눈에 들어왔다. 김용우(55) 무위당 만인회 기획위원장은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동학이 전봉준의 혁명투쟁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며 “생명공경을 내세운 최시형 선생의 사상이 있었기 때문에 동학이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많은 민초들을 위로할 수 있었던 것”이라 설명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난 후 최시형의 삶은 풍전등화의 처지에 몰린다. 조정에서는 동학 괴수를 잡는 이에게 높은 벼슬을 약조했고 그는 오래지 않아 이곳 송골에서 관군에 의해 붙잡히고 만다. 체포된 최시형은 그는 2개월 뒤인 6월2일 교수형으로 세상을 등졌다. 원주 시내에서 71번 시내버스를 이용해 송골정류소에서 하차하거나 중앙고속도로에서 북원주IC를 거쳐 옹산교·지촌교·고산교를 지나면 찾아갈 수 있다.

동학 유적지 기행의 마지막 행선지는 경기 여주시 천덕산 중턱에 위치한 최시형의 묘소다. 험난했던 그의 삶처럼 묘소 역시 경사가 가파른 산기슭에 위치해 있다. “최시형 선생은 평생 산에서 도피생활을 했는데 죽어서도 험한 산 중턱에 있다”며 혀를 끌끌 차는 한 행인의 탄식이 들려왔다.

처형 후 서울 광희문 밖에 버려졌던 최시형의 시신을 동학교도들이 경기 광주에 임시로 매장했고 2년 뒤 유골을 수습해 천덕산에 안장했다. 여주버스터미널에서 금사면·산북면 방면 버스를 탑승한 후 주록리에서 하차하거나 중부고속도로 곤지암IC에서 3번국도, 98번지방도를 따라 만선리 삼거리에서 우회전, 다시 주록리에서 우회전하면 찾아갈 수 있다.

이번 동학 유적 탐방을 함께한 이들은 ‘인간 최시형’을 다시금 돌아볼 소중한 기회였다고 입을 모았다. 윤석산 한양대 명예교수는 “최시형 선생의 사상은 지배와 억압이 아닌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는 데 있다”며 “오늘날과 같은 갈등과 분열의 세계, 지배와 피지배가 나뉘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최시형을 비롯한 동학의 사상은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준다”고 말했다.

<글·사진(영월·원주·여주)=우영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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