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맨하탄의 속옷 무리

2018-06-04 (월)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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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하탄의 속옷 무리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2016년 9월 맨하탄 42번가 밤 9시 경. 어둠이 내린 도시 한복판에 머리에 흰색 팬티를 쓴 사람 수십 명이 떼 지어 행진한다. 그 한 가운데에서는 거대한 하얀색 팬티 안에 7명이 들어가서 어기적어기적 발을 맞추며 행진을 따라가고 있다. “언더웨어~ 언더웨어~ 어딜 가든지 넌 언더웨어 입고 있지~” 하는 노래도 같이 부르고 있다.

박사과정 3년차에 접어들던 해였다. 교육심리학자인 비고츠키의 저작을 함께 읽는 세미나에 참가하던 중 관련 학회에 참석했다.

학회 첫날, 일정표를 받고 강의실에 들어갔더니 의자와 책상은 모두 한 구석으로 치워져 있었다. 그 흔한 프로젝터와 스크린도 없었다. 방 안에 20명 정도 모이자 리더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가 제일 먼저 시킨 건 목을 돌리는 스트레칭이었다. 어안이 벙벙해하는 새에 리더를 따라 팔다리도 쭉쭉 펴 주고, 옆 사람 마사지도 해 주고, 판토마임과 율동도 하고 있었다.


그 다음 세션에 갔더니 양복을 입은 남자 셋이 발표를 하고 있었는데, 셋 다 얼굴에 눈과 입 구멍만 뚫은 종이봉투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취업의지가 없는 실업자 청년을 교육하는 법을 발표하고 있었는데, 실업자 청년들에게 종이봉투를 씌우고 연극을 시켰다고 한다.

다른 곳에 갔더니 영어는 한 마디도 쓰지 않은 채 사과, 포도, 키위 등의 과일과 물 양동이를 갖다 놓고 어떤 과일이 가라앉는지, 밀도의 개념은 무엇인지 일본어와 몸짓만으로 설명하는 호주인 발표자도 있었다. 이쯤 되니 혼란이 쌓인다. 나는 분명히 학회에 왔지 프리스쿨 놀이시간에 온 게 아닌데. 이게 도대체 비고츠키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학회의 클라이맥스는 토요일 밤에 있었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행사였다. 들어가자마자 주머니를 주더니 열지 말라고 했다. 강당에 들어가 보니 요정 옷을 입은 두 명이 세션을 진행하고 있었다.

진행자의 지시에 따라 주머니 안 물건을 하나씩 꺼냈는데, 배 모형을 꺼내서 이 배의 이름은 ‘우정’이니까 옆 사람과 나누라거나, 하트 모양 플라스틱을 꺼내서 다른 사람에게 하트를 전달해주고 오고, 별 모양을 꺼내서 다른 사람에게 “너는 나의 별이야”라고 칭찬해주고 오라고 하고, 10명이 모여서 즉흥연극을 하는 등 기상천외한 활동들을 다 했다.

그리고 주머니 속에서 흰색 팬티를 꺼내서 머리에 쓰라고 하고, 7명이 들어가는 거대팬티를 가져와서 한 조가 한 팬티에 들어가라고 하고, 짤막한 노래를 가르쳐 주더니, 행진하라고 내보냈다. 그렇게 탄생했다. 맨하탄 한복판에서 팬티 노래를 부르며 행진하던 사람들은. 물론 나도 그 일원이었다.

왜 엽기적일 정도로 파격적인 활동을 시켰었을까. 비고츠키에 따르면 모순과 불편을 있는 그대로 겪어내야 성장할 수 있다. 모든 게 편안하고 조화롭다고 느끼는 상태에서 새로운 발달이 일어날 수는 없다.

우리의 세계에 균열이 생겼을 때,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이 생겼을 때 해결책을 찾아 나서게 된다. 이 모순을 풀어가려는 노력이 성장의 추진력이다. 학습자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상황에서 위험을 감수하도록 해야 하고, 집단에 속한 모든 사람이 함께 위험을 분담해야 한다.

학회에서는 일부러 참여자들의 세계에 균열을 냈다. 가만히 앉아서 이론을 듣는 대신에 전혀 모르는 언어로 실험을 시키고, 팬티를 머리에 쓰고 행진을 시켰다. 그렇다고 참여자들을 냅다 떠밀었던 게 아니라, 준비운동도 하고, 옆 사람들과 배와 하트와 별을 교환하면서 유대도 쌓고, 종이봉투를 뒤집어써서 새로운 자아도 만들어내도록 했다. 이 모순과 불편을 다른 참여자들과 함께 겪었고, 이걸 풀어가는 과정에서 비고츠키 이론을 몸으로 배울 수 있었다.

2년이 지난 지금도 때때로 생각한다. 팬티 속에서 행진하면서 느꼈던 혼란과 불편을, 그리고 돌파구를 찾아가면서 함께 성장했던 기분을.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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