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의식 저 깊은 곳의 괴물

2018-06-02 (토)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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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길을 걷고 자동차를 타고, 초고층 건물에 겁 없이 올라가는 것은 한 가지 믿음에 근거한다. 땅은 굳건해서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이다. 하지만 그런 믿음을 뒤엎으며 땅은 때로 흔들리고 무너진다. 우리가 아는 땅은 지구의 거죽에 불과하고, 지각 저 아래 깊은 곳에 불안정한 요소들이 있어 지진이 발생하고 화산이 폭발한다.

21세기 미국에 사는 우리의 일상생활은 한 가지 믿음에 기초한다. 미국은 자유와 평등을 중시하는 민주주의 국가라는 믿음이다. 피부색, 성별, 종교 등의 조건과 무관하게 만인의 평등을 보장한다는 법에 대한 믿음이다. 하지만 믿음은 종종 무너진다. 미국인들의 의식 저 아래 깊은 곳에 인종차별이라는 괴물이 웅크리고 있다. 법으로 단단하게 다져놓은 ‘지각’을 뚫고 ‘괴물’은 불쑥불쑥 튀어 나온다. 지진처럼 화산처럼.

지난 29일 미국에서는 같은 날 의미 있는 두 사건이 있었다. 스타벅스가 전국의 8,000여 매장들을 4시간 문 닫고 17만 5,000명 전 직원교육을 실시한 것 그리고 ABC-TV가 광고수익 수천만 달러를 포기하며 인기 시트콤 ‘로잰’을 퇴출시킨 것이다.


둘 다 원인은 인종차별이었다. 의식의 거죽 밖으로 나오지 말아야 할 ‘괴물’이 돌연 모습을 드러내자 이들 기업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 사회에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다는 선언이었다.

스타벅스의 직원교육은 지난 4월 필라델피아 사건이 발단이었다. 흑인 남성 두 명이 스타벅스에서 비즈니스 파트너를 기다리던 중 경찰에 체포되었다. 커피를 구매하지 않고 있다가 한 남성이 화장실을 쓰려 한 것이 문제였다. 백인 매니저가 즉각 경찰에 신고하고, 경찰은 득달같이 달려왔다.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을 매니저는 왜 신고했을까. 경찰은 왜 체포했을까. 백인들의 의식 깊은 곳에 암석처럼 박혀있는 인종차별이 발동한 결과이다.

미국에서 ‘인종’은 ‘공간’을 규정해왔다. 백인 농장주가 사는 공간과 흑인 노예가 사는 공간은 하늘과 땅처럼 구분되었다. 노예해방 후 20세기 중엽까지 흑인은 식당, 호텔, 학교, 공원 … 어디든 백인 공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남부의 인종분리가 ‘백인들만(Whites Only)‘ 표지를 내걸며 노골적이었다면, 인종적 개방을 내세우던 북부는 교묘했다. 식당은 물론 공원이나 해변 등 공유지에도 ‘고객(지역주민) 외 무단침입 금지’ 팻말을 세웠다. 백인은 어디를 가든 상관없지만 흑인이 들어가면 ‘무단침입’으로 저지/체포당했다.

스타벅스의 두 흑인남성의 죄목이 바로 ‘무단침입’이었다. 백인은 몇 시간씩 앉아 있어도 그런가 보다 하는데, 흑인은 잠깐이라도 죽치고 있으면 바로 문제가 된다. ‘여기 있어도 되는 사람과 안 되는 사람’을 피부색으로 가리는 오랜 차별의 집단적 무의식과 상관이 있다.

스타벅스의 하워드 슐츠 회장은 신문에 전면광고를 내고 직원교육을 시작으로 스타벅스 전 매장을 누구나 환영받는 공간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수백년 인종편견이 몇 시간 교육으로 사라질 리 없겠지만, 차별이 기업에 해롭다는 인식이 생겼다는 데 의미가 있다.

ABC의 ‘로잰’은 20여 년 전 가끔 보았던 시트콤이다. 일리노이의 블루칼라 백인 가족을 둘러싼 코미디물이어서 재미도 있고 백인 서민들의 의식도 엿볼 수 있었다. 코미디언인 로잰 바가 주인공인 ‘로잰’은 높은 시청률 덕분에 1988년부터 1997년까지 장장 9시즌이나 이어졌다.


ABC가 올해 ‘로잰’을 리바이벌시킨 데는 ‘트럼프’ 요소도 한몫했다. ‘로잰’ 팬들이 트럼프 지지층과 겹치니 이들을 겨냥하면 시트콤이 성공하리라는 계산이었다. 실제로 지난 3월27일부터 5월22일까지의 봄 시즌은 대성공이었다. 광고수익이 4,500만 달러에 달했다. 9월에 시작될 가을 시즌 광고수익은 6,000만 달러가 넘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ABC는 단호하게 ‘로잰’을 하차시켰다.

트럼프 지지자인 로잰은 자신의 팬들이자 트럼프 지지층의 환호에 너무 빠져있었던 것 같다. 리버럴, 무슬림, 흑인 등에 대해 험한 말을 할수록 박수를 받자 드디어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 오바마 측근이었던 흑인여성 발레리 재럿 전 백악관 선임고문을 ‘무슬림 원숭이’로 암시/비하하는 트윗을 날렸다. 비난이 화산 폭발하듯 쏟아지자 ABC와 모기업 디즈니 경영진은 즉각 ‘로잰’ 제작중단을 발표했다. ‘로잰’을 지속할 경우 기업으로서 얻을 것보다 잃을 것이 많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트럼프 시대가 되면서 일종의 뉴 노멀이 생겼다. 백인사회가 의식 깊은 곳에 감춰두었던 인종차별을 거침없이 꺼내드는 현상이다. 반면 이에 대한 반작용 역시 강하다. 스타벅스와 ABC의 결정이 그 본보기이다.

미국사회의 의식 깊은 곳 ‘괴물’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소수계 이민자로서 우리 역시 개인적으로, 커뮤니티 차원으로 ‘괴물’의 공격을 당하곤 한다. 차별로부터 우리를 방어해줄 방패가 필요하다. 올해는 중간선거의 해. 반드시 투표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대표를 뽑는 것이 한 방안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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