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번역되지 않는 여성 학자들

2018-05-29 (화) 김성준 콜로라도대 정치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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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되지 않는 여성 학자들

김성준 콜로라도대 정치학 박사과정

수전 몰러 오킨, 캐럴 페이트먼, 한나 피트킨, 보니 호니그, 리사 디쉬, 린다 제릴리, 제인 베넷……. 이들의 공통점은 뭘까? 첫째, 이들은 모두 여성이다. 둘째, 이들은 정치이론 분야에서 상당히 유명한 연구자들이다. 앞의 세 사람은 이미 거장의 지위에 오른 원로들이고, 뒤의 네 사람은 최근 가장 많이 인용되는 정치학자들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들이 쓴 책 중에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한국어 번역본은 한 권도 없다.

한국의 정치학계는 남성 정치이론 연구자들(한국어로 소개된 대표적인 정치이론 연구자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을 꼽을 수 있다)의 저작은 비교적 활발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반해 여성 저자들의 책을 번역해서 소개하는 작업에는 소극적인 편이다.

왜 여성 저자들의 책이 한국어로 잘 소개되지 않는 지 그 배경을 살펴본다면, 누구라도 한국 정치학계의 심각한 ‘남성 중심성’이라는 문제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10명 이상의 교수진을 확보하고 있는 비교적 규모가 큰 한국 대학들의 정치외교학과/학부의 홈페이지를 대략 훑어보면서, 전체 교수진 중에서 여성이 몇 명이나 되는지를 직접 세어 보았다. 서울대 정치외교학부에는 27명의 전임 교수들이 있는데, 이중 3명만이 여성이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는 19명 중에서 2명, 고려대는 16명 중에서 3명, 경희대는 12명 중에서 1명만이 여성이다. 서강대는 10명의 교수 전원이 남성이다. 정치학 일반이 아니라 ‘정치이론’이라는 세부 전공으로 범위를 좁히면, 앞의 학교들을 통틀어서 여성 교수는 단 한 명도 없다.

미국과 영국의 정치학계에서 반복적으로 수행된 연구들에 따르면, 남성 학자들은 같은 남성 연구자의 논문을 여성 학자의 것보다 더 높이 평가하고 더 많이 인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추세는 한국의 정치학계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한국의 주요 대학 교수진의 대부분 혹은 전부가 남성으로 채워진 이상, 서구 남성학자들의 논의가 더 높게 평가되고 더 많이 인용되고 번역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남성 학자들이 남성 연구자들끼리만 교류하면서, 여성 학자들의 논의를 참고하지 않아도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나갈 수 있는 학문사회가 건강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미국이나 영국의 정치학계도 남자 교수들의 비율이 60-70% 정도로 높은 편이지만, 한국만큼 극단적인 성비를 보이지는 않는다.

작년 여름 필자는 현대정치철학이나 정치이론 관련 외서들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한국의 출판사들에 항의해본 적이 있다. 최근 몇 년간 출간 목록을 보니 다 남성 철학자들이나 이론가들의 책이던데, 이게 말이 되느냐고 따져 물었다. 나는 출판사들이 당장 여성저자 할당제라도 도입해야 한다면서, 국내에 소개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몇몇 여성 저자들과, 일 잘하는 것으로 정평이 난 여성 번역자들을 추천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출판사들이 생소한 여성 정치학자들의 이론서를 한국어로 번역해 소개하는 작업에 대해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페미니즘 서적이 한국의 사회과학 베스트셀러 목록을 거의 지배하다시피 하고 있는 요즘 같은 분위기에서도 말이다.

한국이든 미주 한인사회든 여성 인권에 대한 관심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이 관심이 결국은 민주주의와 법 체계를 어떻게 여성과 성 소수자들까지 포함한 모든 시민들의 권리를 대변하고 보장하도록 변혁할 수 있을지에 대한 ‘정치적’ 질문으로 연결되기 마련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정치적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마련하려면 남성 정치학자들끼리 같은 남자들의 논의만을 공부하는 풍토를 깨야 한다.

여성 정치학자를 지원하고 육성하는 한편으로, 이미 실력과 권위를 인정받은 다른 언어권의 여성 정치학자들의 논의를 꾸준히 한국어로 소개해야 한다. 출판계와 학계가 자발적으로 이런 작업을 할 여력이 없다면, 정책적으로라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김성준 콜로라도대 정치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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