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욱, 그의 이름 앞엔 수많은 ‘최초’란 수식어가 붙어다닌다. 한국 최초의 음악 감상실 디제이, 최초의 라디오 방송 디제이, 라디오 방송 최초의 음악 생방송 등. 고교시절부터 팝송에 심취한 그는 고려대에 입학하여 교내 합창단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으며 음악 감상실 ‘디 쉐네’, ‘메트로’, ‘세시봉’, ‘카네기’, ‘뉴 월드’ 등에 진출하여 최초로 마이크를 잡고 ‘음악 디제이’란 영역을 개척했다.
1961년 봄 최동욱은 KBS 라디오에서 매주 수요일 오후 7시 30분부터 30분 동안 방송된 ‘히트 퍼레이드’에서 스크립터와 진행을 맡아 2년 동안 진행했다.
그러던 중 1962년 두번째 민간 방송인 동아방송에 특채로 꼽혀 그 해 11월 미국의 최신 팝송을 소개하는 ‘탑툰쇼’란 프로그램 제작을 담당하게 됐다. 물론 아나운서가 진행을 맡았다. 본인이 직접 진행하고 싶어했지만, 아나운서들의 거센 반발에 마이크 뒤에서 제작자로써만 만족해야 했다. 이렇게 뒤에서 제작만 하다가 1년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한 아나운서가 방송 녹화 중 ‘The Animals’ 의 노래 ‘The House of the rising sun’을 소개하는 멘트에서 ‘라이징 선’을 ‘리이징 선’으로 발음하자 이에 화가 난 최동욱은 녹음 테이프를 폐기하는 사고가 났다.
방송을 불과 15분 남겨둔 순간이었다. 불과 방송 2분 전에 최창봉 방송국장과 전영우 아나운서 실장의 극적인 타협으로 최동욱이 직접 방송하는 탑툰쇼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를 지난 4월 28일 토요일 오후 서울 삼성동 라디오 서울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최동욱씨와의 만남은 우리에게 그는 영원한 방송인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계기가 되었으며, 80이 넘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방송에 대한 열정은 데뷰 당시인 1963년 때와 별다를 바 없어 보였다.
- 최초의 음악 감상실 디제이가 된 배경은?
▲이때에는 음악 감상실이라 하더라도 레코드 판만 틀어주는 ‘PLAYER’ 란 사람이 있었지 디스크자키라는 말을 쓴 일이 없었다. 대학생 때 강제징집으로 복무를 마치고 고려대학교 국문과에 복학한 1960년 무렵 종로 2가에 매머드급 음악 감상실 ‘디쉐네’가 생겨났다. 업주와 상의하여 마이크를 설치하여 종전 플레이어들이 하던 방식과 달리 멘트를 하는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 그 때의 반응은 어떠했나?
▲음악 중간에 멘트를 하는 것이 신기했고 주목을 받으며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 최동욱의 성공으로 그 후 많은 사람들이 디제이로 진출 하게 된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 디제이란 생소한 영역에 나의 뒤를 따라 많은 사람들이 뒤를 이었다. MBC 의 이종환, 박원웅, 선성치, 라디오 서울 (후에 동양 라디오) 의 성우 출신 피세영 등이 활약을 했었다.
- 방송 중 혹 실수한 적은 없었나?
▲물론 실수한 적은 있다. 허나 자연스럽게 처리하여 마치 계획된 실수처럼 보이니까 청취지들이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 비(非) 아나운서 출신으로 첫 생방송 때 주위의 시선은 어땠나?
▲기술부, 아나운서, 제작부 직원들 모두 지켰보았다. 처음이었지만 한치의 실수 없이 무난히 첫 방송을 무사히 마쳐 주변의 우려를 말끔히 씻어 버렸다.
- 3시의 다이얼을 하게된 배경은?
▲그때의 라디오 방송 시간대는 아침 5시부터 10시, 낮 12시부터 2시 그리고 오후 5시부터 12시까지였다. 그래서 낮 방송의 연속성을 위해 3시부터 4시까지 중간의 공백을 이어주기 위해 탄생한 프로가 3시의 다이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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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문 라디오 DJ 및 팝 컬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