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전쟁은 없다

2018-05-12 (토)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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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다.” 2018년 4월 27일,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에서 서명을 마친 두 정상이 합의한 내용이다.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단어가 메아리처럼 귓가에 웅웅거린다. 역사가 생긴 이래 지구 어디에선가는 늘 있어온 전쟁에 익숙해져서 이제는 사람들이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면서도 끔찍한 뉴스를 시청할 정도가 되었다. 마침내 장벽이 무너지는가.

날짜가 다가오면서 국내외의 한인들은 기대감으로 부풀었다. 남북정상회담 바로 며칠 전까지도 얼음비가 내리며 4월이 다 가도록 토론토의 봄은 다가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겨울의 매서운 추위가 오래 계속되다가 모처럼 봄볕이 따스했던 4월 23일. 추위에서 풀려난 많은 시민들이 밖으로 나왔고, 거리는 오후의 햇볕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때 갑자기 텔레비전에서 긴급뉴스가 방영되었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순간이었다. 도로에 피가 흥건하고 천으로 덮여 실려 가는 주검들. 몸을 온전히 보존하지 못한 의미 없는 죽음이 거리에 뒹굴고 있었다. 인파로 활기를 띤 점심시간에 밴차량이 인도로 질주하며 빚어낸 참사였다. 가장 안전한 도시 중 하나라는 토론토에서 일어난 일이어서 아마 충격은 더 컸을 것이다.


한인을 포함한 열 명의 죽음은 국가 차원에서 해명할 수 없는 개개인의 고통이었다. 평화롭던 거리에 들이닥친 공포 가득한 시간을 담은 장면에 이어 범인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실수가 아닌 의도적인 범행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기자는 세계 어디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일어났다고 설명했다.

이해타산을 감추고 국가 간의 대의명분을 내세운 화풀이가 전쟁이라면, 뚜렷한 목적 없이도 불특정 다수를 향해 저지를 수 있는 게 테러이다. 전쟁은 엄격히 통제된 규율 속에 존재하는 무질서와 무자비를 허용하는 당위성마저 갖는다. 세상에 평화를 위한 전쟁이란 말만큼 모순을 드러내는 말이 또 있을까. 전쟁이나 테러, 그 어떤 것도 살육과 파괴를 정당화 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SNS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영상에 나타나는 광경과 소리에 판단을 의존하게 된다. 길을 지나던 시민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길거리를 구르는 선량한 삶의 절규를 먼저 들었다. 무너진 삶 속에 갇힌 고통을 SNS로 생생하게 읽어내는 심경은 현장에 있던 사람만큼이나 충격이었고 더없이 참담했다.

살육의 현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봄 햇살을 찾던 희생자들의 평범하고도 평화로운 일상이 부서지던 순간. 참혹한 시간을 언어로 표출한다는 것은 피가 마르는 일이다.
희생자 중에는 젊은 여성이 많았다고 한다. 이번 토론토 참사를 빚은 범행 동기가 여성 혐오일 수도 있다는 건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다. 비틀린 욕구나 불만을 야만적이고 비열한 방법으로 해소하려는 손에 희생된 죽음 앞에, 살아남은 자들은 할 말을 잃고 조용히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있다.

세계 평화라는 구호는 예나 지금이나 아름답다. 악을 제거하고 평화를 구한다는 명분아래 이어지던 전쟁. 전쟁이 그어놓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남아도 죽은 것 같고 죽어도 삶의 공간을 벗어나지 못하는 죽음은 양쪽 모두 공허할 따름이다.

죽은 자도 산 자도 패자일 뿐인 전쟁이 나의 조국 한반도에서 더는 없을 거라는 소식에, 마음에 봄이 온 듯하다. 한반도뿐 아니라 세상 어느 곳에서도 전쟁이나 테러 없는 진정한 봄이 오기를 기다린다.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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