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엄마의 갱년기

2018-05-04 (금) 12:00:00 송일란(교회 사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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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60에 딸이 없으면, 여섯 살 꼬마가 엄마 없는 것과 같단다. 딸이 있는 나로서는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말이다. 요즘 나와 가장 친한 친구는 딸이다. 쇼핑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딸과 쇼핑을 간 적이 없다. 하이킹을 좋아하지 않는 딸은 나와 한 번도 하이킹을 같이 간 적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가장 친한 친구냐고 물으신다면, 정답은 술친구다. 둘이 술상 한번 펴고 앉으면 이 얘기 저 얘기, 옛날 추억까지 소환해서 속상했던 일, 즐거웠던 일 얘기하며 울다가 웃다가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속상했던 일 얘기하는 중에는 서로 위로받고 치유도 된다. 갱년기 스트레스라도 털어 놓으면 딸아이는 토닥토닥 위로도 잘 해준다.

딸에게 위로를 받고 나면, 나는 자연스레 엄마 생각이 난다. 나도 내 딸처럼 엄마를 위로해 드렸던가... 중고등학교 시절 학교 갔다 오면 교복 입은 채로 식탁에 앉아 학교 선생님들 흉내를 다 내고, 그것도 모자라 친구들 얘기까지 다 하고 나서야 방으로 들어갔던 나는, 대학 들어가서부터는 귀가 시간이 늦어지더니 직장 다닐 때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들어오곤 했다.


그 무렵 엄마가 내게 했던 말이 요즘에 와서 목에 자꾸 걸린다. “예전에는 식탁에 앉아 얘기도 많이 하더니, 얘기할 시간이 없네.” 그때가 엄마 갱년기셨을까? 왠지 우울해지고 기분이 가라앉아 막내딸 붙들고 얘기라도 하고 싶으셨던 건 아닐까. 그런 것을 헤아리지 못했던 철딱서니 없는 막내딸은 연애하느라 바쁘셔서 허구한 날 늦게 들어와 엄마 마음을 살뜰히 챙겨 드리지 못했다. 이제야 늦은 시간 귀가했을 때, 혼자 우두커니 부엌에 앉아 계시던 엄마 모습이 떠오른다.

엄마는 평생 아파도 끙 소리 한번을 내지 않던 분이시다. 그런 엄마가 갱년기까지 아무에게도 하소연 못하시고, 누구에게도 토닥토닥 위로 받아보지 못하고 갱년기를 넘겼다고 생각하니, 가슴에 인두가 닿은 것처럼 훅 뜨겁다가 눈물이 뚝 떨어진다. 엄마 마음 헤아리는 건 왜 이리 늦는 걸까. 미안하고 아쉬운 마음은 회한으로만 떠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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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일란씨는 답십리에서 태어나 어린이대공원 근처에서 자라고, 지금은 이스트베이에 살고 있다. 아직 건강한 몸으로 일할 터전이 있음에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송일란(교회 사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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